盧 강공 드라이브는 계산된 행보?

정치권 새판짜기와 관련설, 본격 진보행보 시각도

노무현 대통령이 달라졌다. 참여정부의 1기 내각을 발표하던 출발선 상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입을 굳게 다문 그의 모습에서 비장한 기운까지 감도는 것 같다.

조각발표 때 노 대통령은 주위의 반대 여론을 짓누르기 보다는 ‘검사와의 대화’를 자청하는 등 비교적 유화적인 해결 방법을 택하곤 했다.

서동구 KBS 사장 임명과 관련해서는 노조 간부를 청와대에 초청해 토론하는가 하면 국회에서도 이에 대한 솔직한 심경을 털어놓았다가 결국 다수의 의견에 따라 서 사장 카드를 집어 넣었다. 여당측에서 반대한 특검제를 한나라당의 뜻에 따라 전격적으로 수용하며 상생의 정치를 펼쳐가는 새로운 대통령 상에 접근하는 듯 했다.

또 진보적 성향에 대한 우려 섞인 시선때문인지 이라크전 파병 동의안을 야당에 기대 관철시켰고, 전교조의 반미교육과 한총련 합법화 문제에 대해서도 ‘속내’와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가장 국민적 반발이 심했던 언론정책 부분에서도 노 대통령은 “각종 정보기관의 보고보다 언론보도가 훨씬 정보 가치가 있어서 중요하다”고 전제한 뒤 “댐 안전성 감사 결과와 정부 대책을 보고하도록 한 것은 신문 기사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언론에 배울 게 많다는 자세로 회귀하는 듯 했다.


야당과 일전불사 의지

하지만 이 같은 노 대통령의 행보는 출범 2개월을 넘기면서 완전히 궤적을 달리하고 있다. 노 대통령이 정치권과의 밀월관계를 청산하는 첫 신호탄은 고영구 국가정보원장의 임명 강행서부터. 국회 정보위에서 여야가 함께 사실상의 만장일치로 임명 부적절 의견을 냈으나 노 대통령은 4월25일 그를 전격적으로 임명했다. 그러면서 국회를 향해 ‘월권’ 운운하며 날을 세웠다.

4월30일에는 한나라당이 그토록 반대한 서동만 교수를 국정원 기조실장으로 발탁, 임명장을 수여했다. 당연히 야당이 청와대를 향해 불을 뿜었으나 노 대통령은 아랑곳 않고 다음날인 5월1일 MBC TV의 100분 토론회에 참석해 국정원 인사의 타당성을 국민 앞에 역설했다. 한나라당을 비롯한 여야 정보위의 의견 자체를 냉전시대 산물로 몰아붙인 셈이다.

100분 토론회 자리에서는 구속영장이 기각된 측근 안희정씨에 대해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인 사안인 데도 이례적으로 ‘동업자’ ‘나로 말미암아 고통받는 사람’이란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검찰 수사에 어떤 식으로라도 영향이 미칠 것은 자명한 데도 속내를 감추지 않고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안씨를 두둔하고 나섰다.

이밖에 4ㆍ24 재ㆍ보선 이후 정국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신당 창당작업의 빠른 진행도 이런 노 대통령의 태도 변화와 무관치 않다는 관측이다. 청와대와 신 주류의 상호 교감 속에 신당 창당에 더욱 가속도를 붙여가고 있는 것이다.

일련의 노 대통령 행보를 거슬러 보면 4월24일 재ㆍ보선 이후부터 태도가 돌변한 것을 알 수 있다. 민주당 간판을 단 7명의 후보가 모두 탈락하는 소위 ‘7전 전패’에 대한 충격은 한나라당의 선전과 맞물려 노 대통령의 노선 수정에 결정적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의 최근 모습에는 마치 ‘더 이상 늦춰서도 안되고 더 이상 밀려서도 안 된다’는 임전무퇴의 결연한 자세를 읽을 수 있다. 이에 따라 국정원장 임명 문제로 정국이 급랭 상태에 빠져들었지만 앞으로 청와대와 야당간에는 더욱 찬 냉각기류가 흐를 것이란 전망도 있다.


국회 반대에도 국정원 인사 잇단 강행

노 대통령은 고영구 국정원장 임명에 대한 한나라당과 민주당 일부 의원들의 반발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국회 정보위가‘불가’ 판정을 냈던 서동만 국정원 기조실장 카드를 꺼냈다. 한나라당은 서 교수를 임명할 경우 전면전에 돌입하겠다고 경고해 왔기 때문에 노 대통령의 서 교수 임명 강행은 야당과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의지로 읽혀진다.

당장 여당에서부터 잡음이 새어 나왔다. 김성순 의원은 “인사는 대통령 고유 권한이라지만 국민으로부터 위임 받아 적임자를 선택하는 것”이라며 “고유 권한이란 왕조시대에나 있는 것”이라고 혹평했다. 한 초선 의원도 “하나(고 원장) 임명했으면 하나(서 기조실장)는 양보하는 게 정치 아닌가”라고 비판적 입장을 보였다.

여당에서 이럴진 대 한나라당에서는 당연히 사생결단의 자세로 나왔다. 박희태 대표권한대행은 “대통령이 국민과 국회에 대해 적나라하게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면서 “아직 늦지 않았으니 국정원 인사를 백지화해야 한다”고 인사 철회를 요구했다.

이규택 총무도 “고 건 총리와 이라크 파병동의안을 통과시켜 줬고, 장관들에 대한 해임건의안 제출도 유보했는데 노 대통령이 두 달도 안돼 스스로 이런 밀월관계를 깨뜨렸다”면서 노 대통령에게 화살을 돌렸다.

비교적 중립적 자세를 견지하던 박관용 국회의장도 “민주주의에서 진정한 정치 개혁은 입법부와 행정부가 상호 견제와 감시를 통해 균형을 유지해 가는 것”이라며 “인사청문회 취지를 살리기 위해선 국회의 정신을 따라주는 게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쏟아지는 비판적 여론 속에 100분 토론회에 나온 노 대통령은 “개혁과제는 물론 국회와 원만한 관계 유지를 모두 이루고 싶지만, 국정원이 국민 신뢰를 잃고 제 기능을 다 못해 제자리로 돌려놓는 개혁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며 “야당이 찬성하지 않더라도 원만한 관계보다 개혁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며 임명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그는 또 “국정원 개혁과 국회 존중이라는 두 가지를 다하면 좋은데 지금은 국회 기세가 등등해서 가봤자 문전박대 당할 것 같아서 안 했다”며 국회에 양해를 구하지 못한 이유를 설명했다. 뒤집어 보면 국회의 반대는 예견된 터였으니 원활한 국정 수행을 위해 이를 무시하는 강공책을 써야 했다는 논리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도 “기조실장 인사에 대한 야당의 반대 논리는 전혀 근거없는 것”이라며 타협의 정치를 외면했다. ‘고 원장을 대통령 뜻대로 임명했으니 서 실장 문제는 양보하지 않겠느냐’는 세간의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는 노 대통령의 초강수였다.


안희정씨 감싸기는 검찰 압박용?

노 대통령은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인 안희정씨 부분에 대해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나왔다. 사실 구속영장이 기각된 안씨에 대한 검찰 수사는 초기 단계서부터 해석이 분분했다.

노 대통령이 스스로 조성한 검찰과의 불편한 관계에 따라 검찰 측에서 의도적으로 측근 수사를 고집하다 무리한 영장 청구로 망신살을 자초했다는 해석이 있는가 하면, 기각될 것을 예감하고도 혐의 적용이 어려운 정치자금법을 걸고 나와 의도적인 ‘봐주기 수사’를 진행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대통령 측근을 애써 사법처리하려는 모습에서 검찰의 중립적 모습도 과시하고, 영장기각으로 안씨를 불구속 상태로 풀어줘 대통령에 대한 예우도 챙긴, ‘1석2조’의 효과를 거뒀다는 설이 설득력 있게 퍼지고 있다. 가뜩이나 영장 재청구 여부가 논란 거리로 제기된 마당에 노 대통령은 알 듯 모를 듯한 말로 안씨 감싸기에 나선 건 ‘심했다’는 비판을 받기에 충분하다.

그는 안씨를 ‘동업자’라고 칭한 뒤 “나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고 있다” “나를 위해 일하던 사람이 수사를 받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난감한 심정’이란 말로 속내를 표현했지만 정작 난감해진 쪽은 검찰 측이다.

‘나로 말미암아…’ 부분은 노 대통령이 나라종금으로부터 제공된 자금의 흐름을 어느 정도 알고 있거나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는 뜻으로 들리기도 한다. 자금 조달과정을 전혀 몰랐다 해도 결국 본인이 최종 수혜자였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일 수도 있다.

안씨 사건의 요체는 보성그룹 측으로부터 들어온 2억원이 노 대통령과 연관이 있는 연구소로 흘러 들어간 부분. 상식적으로 국회의원도 아닌 안씨만을 보고 기업에서 그런 거금을 후원금으로 지급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지금도 웬만한 국회의원은 후원회를 개최해도 1억원을 모으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결국 노 대통령과 직접 관련이 없더라도 제공자 입장에서는 어떤 각도에서든지 대통령과의 연관성을 의식하지 않았겠느냐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결국 검찰에서 안씨에 대해 당장 영장 재청구를 할 것인지, 한다면 어떤 식으로 할 것인지, 시중에서 떠도는 노 대통령과의 관련설에는 어떻게 대응할 지가 관심사로 떠오른다. 이런 상황에서 노 대통령의 안씨 두둔은 검찰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하는 결과로 작용한 것만은 분명하다.


신당 창당작업도 이례적인 급가속 페달

4ㆍ24 재ㆍ보선 이후 민주당내에서는 갑자기 신당 창당설이 핵심과제로 떠올랐다. 중진의원들이 잇달아 회동하고 신 주류 측에서는 창당 시나리오를 유포하며 구 주류를 압박했다. 하루가 다르게 이야기가 진전돼 당초 반대 입장이던 동교동계의 구 주류도 10여일 만에 창당 찬성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기는 듯한 양상이다.

이에 대해 노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된 결과라는 해석이 퍼지고 있다. 실제 노 대통령은 신당 창당작업에 대해 “말할 권리도 있고 어찌보면 의무도 있는 데 당정분리라는 원칙 때문에 말할 수도 없고, 속내는 뻔한데…”라는 말로 대신했다. 직접 나서서 진두지휘하고 싶지만 그럴 형편이 아니니 알아서 움직여 달라는 말이다.

노 대통령은 5월7일 정대철 민주당 대표를 청와대로 불러 대야 문제와 신당 작업과 관련한 회동을 갖는다. 여기서 신당에 대한 밑그림과 대야 관계의 대응방향 등이 정해질 것으로 보인다. 세부적으로는 일련의 노 대통령의 행보를 감안, “더욱 고삐를 바짝 틀어쥐고 전진할 것을 주문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정국이 이미 급랭했고 신당 문제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만큼 차제에 노 대통령의 개혁 정책을 실체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창당작업을 더욱 가속화하란 얘기가 나올 것이란 전망이다. 우물쭈물거리거나 좌우의 눈치를 볼 시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듯 노 대통령의 계속되는 강공 드라이브는 재ㆍ보선이후 연일 쉬지 않고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여여 갈등과 청ㆍ한 충돌에 이은 정국 급랭까지 자초하면서 강경책을 견지하는 것일까. 이를 놓고 일부에서는 이라크 파병 동의안과 특검법 서명으로 잃어버린 핵심 지지층을 되돌리기 위한 회유책이라고 말한다.

다른 쪽에서는 노 대통령이 이제 본격적인 진보 색깔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진짜 이유는 어디에 있는 지 아직 가늠할 수는 없다. 다만 ‘이대로 가다가는…’이란 위기의식 속에 진행되는 보혁구도식 이분법적 새판짜기라는 ‘노무현식 해법’에 무게가 실린다.

염영남 기자

입력시간 2003/05/07 13:51


염영남 libert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