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발로 그린 영국판 대동여지도


■ 세계를 바꾼 지도
사이먼 윈체스터 지음/임지원 옮김/사이언스북스 펴냄.

런던 피카딜리 북쪽에 있는 벌링턴하우스. 수많은 대리석 계단의 꼭대기에는 보는 이의 궁금증을 자아내려는 듯 거대한 하늘색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도대체 그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커튼 뒤에는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놀랍고 웅장한 지질도가 숨어있다. 가로 2m, 세로 3m의 크기가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지도 오른쪽 윗부분에는 동판으로 찍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지층 및 스코틀랜드의 일부 지층에 대한 개설’. 그리고 서명과 날짜가 들어가 있다. ‘W. 스미스, 1815년8월1일’.

이 지도가 바로 새로운 과학의 탄생을 예고하는 세계 최초의 지질도다. 이로써 인류는 종교적 교의의 안개를 걷어내고, 인류 자신이 살고 있는 행성의 근원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도달하는 시대의 문을 열었다. 한편으로 이 지도는 어마어마한 부를 일구는 데 기반이 됐다. 이 지도를 가지고 사람들은 오일, 철광석, 석탄 등의 광물을 지하에서 캐냈던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 지도를 만드는 작업은 옥스포드 영어사전 편찬사업, 맨해튼 프로젝트, 인간게놈 연구 등에 못지 않는 광대한 규모의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이 지도의 경우 다른 프로젝트와는 현저하게 다른 점이 있었다. 수천 수만의 노력이 필요했던 여타 프로젝트와는 달리 이 지도에는 오직 한 사람의 숨결만 들어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국 국토의 지하세계를 지도에 그려넣는 어마어마한 작업이 군대나 위원회나 팀이 아닌 한 개인의 손에 의해 완성된 것이다.

그가 바로 윌리엄 스미스다. 그의 작업은 고독 그 자체였다. 오로지 혼자서 20년 동안 영국 방방곡곡을 걸어서, 또는 마차를 타고 다녔다. 그의 지도는 상업적, 지적, 국가적으로 커다란 이익을 안겼지만 어이없게도 그의 인생은 망가졌다.

빚에 몰려 자신의 집에서 쫓겨났고, 그의 아내는 정신병원에 감금됐다. 설상가상 그는 표절의 희생양이 됐다. 시골의 대장장이 아들이었던 그의 배경을 못마땅하게 여긴 영국의 초대 지질학회 회장과 회원들은 그의 업적을 가로챘다.

그러나 긴 시간이 지난 후 한 친절하고 진보적인 귀족이 그를 알아보았고, 그는 마침내 자신이 만든 위대한 걸작품에 합당한 명예와 보상을 받게 된다. 영국 지질학의 아버지로 추대된 것이다. 옥스퍼드대학에서 지질학을 공부한 학자이면서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한 작가이기도 한 지은이는 이같은 스미스의 인생을 한편의 드라마처럼 감동적으로 엮었다.

책을 읽는 동안 혼자서 삼천리 방방곡곡을 돌아다닌 끝에 대동여지도를 만든 고산자 김정호가 자연스럽게 오버랩된다. 살아서 영예를 되찾았던 스미스와는 달리 고산자는 끝내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고 ‘국가 기밀 누설죄’로 옥사했다고 하는데.

최성욱 기자

입력시간 2003/05/20 15:21


최성욱 feel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