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 콜금리 인하, 외압이 아니라면…신뢰에 먹칠

박승 총재가 "시기 아니다"서 "인하"로 급선회, 배경에 의문

내리기는 쉬워도 올리기는 어려운 법이다. 금리에 관한 속설이다. 국민의 인기를 먹고 사는 정부가 금리를 올려 경기를 위축시키고 성장률을 낮추는 정책 수단을 달가워할 리 없는 탓이다.

지난해 초 경기 과열 논쟁이 불 붙으며 금리 인상 요구가 빗발쳤다. 통상 금리 정책 변화는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2개월 후에야 효과를 내기 때문에 시장에 조기 경고 메시지를 줄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었다.

하지만 ‘독립 기구’ 한국은행은 수 차례 여론을 외면했다. “경기가 적정 수준까지 부양되는 데는 아직 여유가 있다”는 분석이었다. 하지만 5월, 결국은 콜금리 목표를 4.0%에서 4.25%로 상향 조정했다.

“한은이 그 당시 콜금리 인상에 실기하지 않았다면 부동산 과열이나 신용 대란을 어느 정도는 차단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한 국책연구소 연구위원은 심지어 “한은의 직무 유기”라고 까지 이야기했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늘 첨예한 논쟁의 도마 위에 오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중앙은행이 정권에 휘둘릴 경우 금리는 매번 아래 쪽으로만 향할 수밖에 없다. 극심한 인플레이션 상황이 아니라면 말이다.


뒷말 끊이지 않는 금리 인하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5월13일 콜금리 목표를 0.25%포인트 인하했다. 1년 만이다. 이유는 경기 부양과 고용 안정. 박 승 한은 총재는 “경기, 고용과 부동산 문제를 놓고 금통위원들이 심각하게 고민했으나 결국 경기와 고용 쪽을 택했다”고 말했다. 사스(SARS) 확산과 북핵 문제 등으로 좀처럼 회복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경제에 군불을 때겠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뒷말이 끊이지 않고 있다. 박 총재는 금통위 회의 직후 가진 기자 간담회에서 ‘외압설’에 대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왜 외압설에 대해서는 질문을 하지 않느냐”고 자청해서 운을 뗀 그는 장장 40여분을 할애해 외압설을 해명했다.

하지만 박 총재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외압’ 의혹은 가시지 않고 있다. 금리 인하 효과에 대한 의문도 강하게 제기된다. 무엇보다 불 붙고 있는 부동산 시장에 기름을 부은 격이라는 지적이 쏟아진다. 새 정부 초기 한은이 다시 한번 독립성과 신뢰성 훼손의 중대 위기에 봉착한 셈이다.

1개월 전, 한은과 정부는 경제 상황에 대한 인식을 놓고 정면 대립했다. 대립의 선봉에는 국내 통화 정책을 담당하는 박승 총재와 경제 정책을 총괄하는 김진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이 섰다. “현재 한국 경제가 어렵지만 중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는 나은 편이다.

한은이 4.1%로 성장률 전망치를 하향 조정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보다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박 총재, 4월17일 국회 재경위 업무 보고) “한국은행이 올해 4%대 경제 성장이 가능하다고 했지만 정부로서는 낙관만 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당초 많은 전문가들이 이라크 전쟁 후 선진국의 경기 부양 조치로 세계 경제가 회복될 것으로 전망했지만 막상 전쟁이 끝난 뒤에는 낙관하는 사람이 적다.” (김 부총리, 이튿날 국회 재경위 업무 보고)

이 같은 경기 인식 차이는 경기 부양을 둘러싼 대립으로 이어졌다. 박 총재가 “금리 인하 등 적극적인 경기 부양책을 쓸 시기가 아니다”고 못박은 반면, 김 부총리는 “경기 부양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맞섰다.

하지만 불과 2주 뒤 ‘대립’은 ‘공조’로 바뀌었다.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 주재로 경제 정책 회의가 열린 바로 다음날인 4월30일. 박 총재는 이때까지의 발언을 180도 뒤집었다. “사스와 북한 핵 문제가 우리 경제에 적지 않은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 만큼 이에 대한 분석을 관련 부서에 지시했다. 이를 토대로 통화 정책의 변경 여부를 검토하겠다.” 사실상 5월 콜금리 목표의 인하를 시사한 발언이었다.

김 부총리도 힘을 보탰다. 그는 같은 날 한 강연에서 “올해 물가 상승률이 3%대로 예상되는 데 비해 현재 콜금리는 연 4.25% 수준으로 상대적으로 높아 탄력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곳곳에서 들끓은 외압설

한은 총재가 말을 바꾼 것을 두고 한은 안팎에서 외압설이 들끓기 시작했다. 청와대 회의 직후, 그것도 불과 2주일 만에 한은 총재의 입장이 정반대로 뒤집어졌으니 어쩌면 당연했다. 금리 인하 반대 여론도 불거졌다.

포문은 한은 노조가 열었다. “한은이 짧은 기간에 ‘금리 인하 무용론’에서 ‘가능성 검토’로 입장을 변경한 과정에 정부의 압력이 작용했다는 논란이 제기되면서 정부와 한은의 경제 정책 결정 시스템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일고 있다. 이에 대해 정부와 한은은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 한은 노조는 성명을 통해 외압 의혹을 강력히 제기했다.

유례 없이 자체적인 금리 설문 조사에도 나섰다. 노조는 여론 조사 전문기관인 한길리서치에 의뢰해 경제 전문가 276명을 대상으로 금리 설문 조사를 실시한 결과 현 시점에서 콜 금리 인하가 경기 부양에 별 다른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응답이 62.3%에 달했다고 공개했다. 한은의 통화 신용 정책에 대해서는 ‘적절히 수행하고 있다’는 응답(32.2%) 보다 ‘그렇지 못하다’는 부정적인 응답(66.4%)이 배 이상 많았다.

한은 홈페이지 게시판에도 외압 의혹이 들끓었다. “이번 기회에 한국은행과 원화를 없애고 미국 달러를 기축 통화로 사용하자.”(달러리제이션) “왜 한은 총재가 부총리 말을 따라야 하나.”(그린스펀) “감독: 재경부장관, 연출: 한국은행 총재.”(아무개) “한국은행은 역시 재경부의 이중대.”(금리 인상) ….

시민단체와 정치권도 가세했다. 경실련은 성명을 통해 “심장 동맥경화증에 걸린 환자에게 수술(구조조정) 없이 혈압강하제(금리 인하)를 쓰거나 수혈(재정 지출)만 하는 격”이라며 “금리 인하는 부동산 투기나 가계 부실 확산 등 부작용만 부추길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정세균 민주당 정책위의장도 5월7일 청와대에서 정대철 대표 등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한은이 금리 인하를 검토한다는데 부동산 투기 대책이 전제되지 않는 금리 인하는 상당히 위험하다”고 건의했다. 그야 말로 입이 달린 사람들은 한 마디씩 거드는 형국이었다. 그만큼 한은의 위상이 추락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한은 독립성에 치명적 오점

설사 외압에 따른 결정이 아니었다 해도, 다시 말해 한은이 독립적인 결정을 내린 것이라 해도 한은의 신뢰성에 먹칠을 했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오점을 남겼다. 한 시중은행 임원은 박 총재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중앙은행 총재의 한 마디 한 마디는 곧 정책이나 다름 없습니다. 이른바 ‘발표 효과’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죠. 그런 막중한 자리에 있는 총재가 아무리 상황이 바뀌었다고 해도 불과 2주일만에 입장을 180도 바꾸는 것은 스스로 무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닙니까.”

이미 오래 전 실기한 뒷북 정책이라는 비판도 뒤따랐다. 금융연구원 최공필 선임연구위원은 “지난해 말 현재 상황을 예측하지 못하고 금리를 선제적으로 인하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 금리 인하는 맥이 빠질 수밖에 없다”며 “한은이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흉내는 내고 있지만 현실을 보는 인식이나 판단이 너무 뒤쳐지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벌써부터 금리 인하의 실효성이 없을 것이라는 지적들도 공공연히 나돌고 있다. 장단기 금리 차가 거의 없는 왜곡된 채권 시장을 바로 잡고 소비 둔화를 해소하는데 다소간 기여할 수는 있을지언정, 설비 투자 확대 등을 통한 경기 부양이 가능할 거라고 믿는 전문가들은 그리 많지 않다. 지정학적 리스크 등으로 인해 금리와 투자 간의 관계가 단절된 지 이미 오래됐다는 얘기다.

반면 금리 인하에 따른 부작용은 이미 가시화하고 있는 양상이다. 그동안 경기 부양용 저금리 정책이 낳은 가계 대출과 신용 불량자 급증, 부동산 투기 등이 더욱 극성을 부릴 조짐을 보이고 있는 탓이다. 한은이 콜금리를 인하한 이후 비관적인 경기 전망이 확산되면서 뭉칫돈이 주식시장은 외면한 채 안전 자산인 채권시장과 부동산시장으로만 몰려 들고 있다.

게다가 콜금리 인하 직후 시중 은행들이 예금금리 인하에 발벗고 나섰으나 대출금리 인하에는 상대적으로 인색해 경기 부양 효과가 실종됐다는 지적까지 흘러나오고 있다.


한국의 그린스펀은 공허한 꿈?

요즘 야당 의원 109명이 한은법 개정안을 발의하면서 한은 독립을 둘러싼 재경부와 한은의 해묵은 논쟁이 다시 재연되고 있다.

개정안은 ▦금융통화위원 중 재경부 몫이던 민간 추천위원 폐지 ▦한은 부총재의 당연직 금통위원 임명 ▦재경부의 한은 예산승인 폐지 ▦한은의 금융기관 단독검사권 부여 등을 담고 있다. 한은이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제출했던 내용을 대부분 그대로 수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간 한은 독립을 적극 지지했던 전문가들도 이번 만큼은 추이를 관망하며 한 발 물러 서 있는 듯한 양상이다. 한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탓이다. 금융계 한 고위 관계자는 “한은 독립이 더 이상 제도적, 법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구성원들의 전문성과 정책적 소신의 문제라는 인식이 팽배하다”며 “한은 총재가 금통위 의장을 겸임하고 있는 현 체제에서도 얼마든지 독립적인 정책 결정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꼬집었다.

내년 6월 네번째 임기가 끝나는 미국 FRB 앨런 그린스펀 의장에 대해 최근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재신임 뜻을 표명하자 뉴욕 증시는 환호하며 큰 폭의 상승으로 화답했다. 과연 국내에서 똑 같은 상황이 발생한다면 시장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혹시 증시가 폭락하는 사태만 막을 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믿는 이들은 없을까.

이영태 기자

입력시간 2003/05/20 15:33


이영태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