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이 있는 집] 삼청동 풍차

개운하고 풍미 가득한 파스타, 삼청동 길의 새로운 추억

동십자각에서부터 삼청공원에 이르는 길은 서울에서 손에 꼽을 만한 멋이 느껴지는 길이다. 경복궁 돌담길을 따라 걷는 맛도 그만이요, 즐비하게 늘어선 갤러리를 기웃거리는 것도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이다. 봄, 여름이면 푸른 가로수가 우거지고, 가을에는 노랗게 물든 은행나뭇잎이 정취를 더하곤 한다.

까맣게 잊고 지내던 예술이라는 장르가 이곳에서는 일상에 가깝다. 아무 갤러리나 불쑥 문을 열고 들어가 미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거창하게 미술관 관람이라는 이름을 붙일 것도 없이 이 길을 걷다 보면 그저 산책 삼아 들러 보게 되는 것이다. 단지 몇 걸음 안에 미술(혹은 예술)이 있다니. 유쾌한 일이다.

청와대로 갈리는 삼거리를 지나면 길은 왕복 2차로로 좁아지고 분위기는 한층 삼청동다워진다. 길가에 올망졸망 들어선 상점이며 식당들이 정겹다.

누구나 삼청동 길에서 한가지 추억쯤은 가지고 있을 법하다. 삼청공원에서 부모님 몰래 술을 마시던 10대의 어느 밤이라거나, 은행잎들이 노란 비처럼 떨어지던 날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거닐던 기억 같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요즘 세상에서 그 길만은 유난히 변화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삼청동 길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오랜만에 삼청동 길을 찾은 날, 한여름 소나기처럼 굵은 비가 내린다. 비에 바짓가랑이를 흠뻑 적시며 삼청공원 바로 직전에 있는 아담한 건물로 들어선다. 수수한 외관과 달리 ‘풍차’는 파스타 전문 레스토랑이다.

점심이나 저녁식사로 파스타를 먹는 것은 이제 특별할 일도 아니게 되었다. 젊은 층뿐만 아니라 중장년층도 별미 삼아 가끔 파스타를 즐기곤 한다. 모든 음식이 그렇지만 파스타의 경우는 특히 잘 만드는 집과 그저 그렇게 흉내만 낸 곳의 맛의 차이가 심하다. 제대로 요리한 파스타는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느끼한 맛이 아니다. 다양한 종류만큼이나 맛도 다채롭고 그 가운데 우리 입맛에 잘 맞는 것들도 무척 많다.

삼청동 풍차는 입맛에 딱 맞는 파스타를 요리하는 집이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집이라는 광고가 그저 허풍만은 아니다. 물론 세상에서 제일은 아니지만 이제까지 맛본 곳과 비교해 보자면 서울에서 손꼽을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간혹 파스타와 스파게티의 차이를 모르는 이들이 있는데 스파게티는 파스타의 일종이다. 우리가 잘 아는 긴 면발의 스파게티와 샐러드에 넣어 먹는 마카로니, 나비넥타이처럼 생긴 파르팔라, 납작한 만두 같은 라비올리, 꽈배기 모양의 푸질리, 넙적한 종이 같은 라자냐. 이것들 외에도 훨씬 더 많은 종류가 있다.

느끼한 것을 싫어한다면 감베로니 파스타를 권한다. 왕새우와 올리브 오일로 맛을 낸 해물 스파게티인데 매운 고추를 넣어 국물이 개운하다. 올리브 오일이 들어가 맛이 부드러우면서도 고소한 뒷맛이 남는다. 올리브 오일 덕분에 국물 맛에 풍미가 더해지는 느낌이다. 국물까지 알뜰하게 떠먹는 스파게티는 흔치 않다.

크림소스를 좋아한다면 마레 크림 링귀니가 제격이다. 새우와 조개, 농어가 들어간 크림 스파게티인데 소스가 고소하다. 크림 소스를 쓴 스파게티의 경우 얼마간 먹으면 속이 느끼해 지기 일쑤인데 여기서는 느끼한 맛이 거의 없다.

메인 요리 전에 나오는 신선한 샐러드는 입맛을 돋운다.

안타까운 것은 풍차의 주인이 곧 바뀔 거라는 것. 같은 상호에 같은 종류의 요리를 선보일 예정이라지만 주방장이 바뀌면 맛도 바뀌게 되리라는 것은 뻔한 이치. 식당 일이 힘들어 잠시 쉬었다가 대학로에 다시 문을 열 생각이라고 한다.

다 먹고 나서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요리를 만드는 풍차의 스파게티도 삼청동 길의 추억 가운데 하나로 남을 것 같다.

▲ 메뉴 : 감베로니 파스타 15,000원, 마레 크림 링귀니 11,000원. 그밖에 라자냐, 리조또, 다양한 소스의 스파게티 등을 요리한다. 02-734-5454

▲ 찾아가는 길 : 삼청동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삼청공원 직전. 공원 건너편에 자리한다.

▲ 영업시간 : 점심, 저녁식사를 할 수 있다. 밤에는 간단한 맥주, 와인도 가능. 월요일은 정기휴일.

글 김숙현(자유기고가)

입력시간 2003/05/22 09:55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