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갑 폭탄선언, 왜?

호남민심 급격한 변화 예상, 청와대 곤혹

민주당 한화갑 전 대표가 긴 침묵을 깼다. 민주당 신당 창당과 관련해 공식적인 언급을 자제하던 그가 5월25일 기자회견을 갖고 구 주류를 비롯한 민주당 사수파의 손을 높게 들어줬다. 한발 더 나아가 한 전 대표는 노무현 대통령을 겨냥, 신당에 대한 입장 표명을 요구하는 등 청와대와도 대립 각을 세우려 했다. 결별로 가는 수순밟기가 아니냐는 관측이 더욱 무게를 얻고 있다.

한 전 대표는 회견 전날인 24일 구 주류측 ‘민주당 정통성을 지키는 모임'(정통모임) 회장인 박상천 최고위원과 만나 미리 회견 내용을 조율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청와대 유인태 정무수석과 신당파인 김태랑 최고위원, 배기선 의원 등은 신당 불참이라는 한 전대표의 ‘폭탄 선언’을 만류하고, “함께 가자”며 설득에 나섰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한다.

구 주류 등 민주당 사수파는 한 전 대표의 태도에 환영의 뜻을 밝히며 천군만마의 지원군을 얻은 듯한 기세이지만, 신 주류 측은 즉각 반박하고 나서 신당 추진 강행 의지를 밝히는 등 민주당이 일촉즉발의 분당 위기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이에 따라 “분당은 막자”며 구 주류 및 중도파 설득작업에 나섰던 신 주류 온건파들의 입지가 급격히 위축되고 있다.


통합신당 추진에도 반대

신 ㆍ구 주류 양측에게 열렬한 구애를 받던 한 전 대표는 기자회견에서 “민주당을 해체하고 국민을 분열시키는 신당 논의는 성공할 수 없다”고 신당 불참을 공식 선언한 뒤 “임시전당대회를 조기 소집해 새 지도부를 구성하자”고 제안하고 나섰다.

그는 또 “당의 분열과 파쟁을 일으키는 비공식적 (신당 추진) 기구는 해체해야 한다”며 “통합신당은 사실상 민주당 중심의 혁신이므로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는 신당을 만들 필요가 없다”고 신 주류 온건파의 통합신당 추진에도 반대의 뜻을 내비쳤다.

이와 함께 노무현 대통령이 신당에 대한 입장을 밝힐 것을 요구하고 “대통령을 배출한 당을 깨고 또 다른 ‘대통령당’을 만드는 것은 3류 정치의 전형”이라고 정면으로 들이 받았다.

그는 노 대통령의 침묵을 신당에 대한 묵시적 지원으로 규정, 신당을 ‘대통령 친위정당’으로 몰아세웠고 신당추진세력을 ‘쿠데타’ 세력이라고 비판하는 한편 “분당된다면 책임은 소수 강경파에 있다”고 미리 못박고 나섰다. 노 대통령과도 각을 세우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면서 향후 분당시 책임이나 명분 다툼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계산법도 들어있다.

구 주류 측은 “신 주류 온건파의 각개전투 전략에 흔들리던 일부 의원의 마음도 이 기회에 다잡을 수 있다”며 한 전대표의 발언을 환영했다. ‘정통모임’회장인 박상천 최고위원은 “민주당 해체에 반대하고 민주당 정통성 수호에 뜻을 같이한 것에 대해 환영한다”고 말했으며 정균환 원내총무도 “민주주의와 중도개혁주의를 몸으로 실천해온 분으로서 오늘 판단은 그것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한껏 치켜 세웠다.

이에 대해 신 주류측은 실망감이 가득하면서도 겉으로는 애써 무시하려는 태도가 역력하다. “신당 대세에 영향 없다”(이재정 의원), “상황인식이 잘못됐다”(이강래 의원) “장고끝에 악수”(이종결 의원)라고 폄하하면서 신당 추진을 강행할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강래 의원은 한발 더 나아가 “한 전 대표가 신당 필요성을 제기한 지난해 8ㆍ8 재ㆍ보선 이후보다 신당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며 “한 전 대표의 논리는 맞지도 않고, 그 사람이 중단하라고 중단할 신당이 아니다”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신 주류 측의 비판의 수위는 생각보다 그리 높지 않았다는 평이다. 한 전 대표가 신당에 대해 일단 선을 그었지만 신당 논의과정의 유동성과 맞물려 앞으로의 입장변화 등을 기대하기 때문인 듯 하다.

신 주류측은 신당을 계속 밀어붙일 태세다. 이상수 사무총장은 “예정대로 5월28일 2차 워크숍을 열어 신당 추진안을 확정, 30일께 이를 당무회의에 상정하겠다”며 강행방침을 시사했다.

반면 중도파의 입장이 더욱 안개 속으로 빠져들었다. 기존의 중간자 역할을 고수하면서 사태추이를 관망하기 위한 ‘엎드려 쏴’ 자세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정대철 대표는 한 전 대표의 신당불참 선언 이후에도 “민주당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모든 분들과 함께 (신당에) 갈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구 주류를 포용하는 신당 추진 의사를 거듭 밝혔지만 왠지 힘이 빠져 보인다.

중도성격의 통합개혁모임 총간사 강운태 의원은 “한 전 대표의 당 해체 반대는 찬성하지만 임시전당대회 소집은 통합신당 노력을 더 해 본 뒤 추진할 사항”이라고 신중론을 폈다. 일부 중도파 의원들이 한 전 대표의 신당불참 선언에 영향을 받아 신당 논의에서 아예 발을 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이들의 사시(斜視) 행보도 더욱 오리무중이 되고 있다


난감한 청와대, “어찌하오리까”

한화갑 전 대표가 노 대통령의 입장 표명을 요구함에 따라 청와대가 가장 난감한 처지에 몰렸다. 노 대통령은 그동안 당정분리 차원에서 민주당에 대한 관여 폭을 스스로 제한해 왔다. 그러나 민주당의 구 주류의 좌장격인 한 전 대표의 요구로 또 다시 자신의 입장이 적지 않은 논란거리로 비화할 소지가 있어 곤혹스런 표정이다.

이와 관련, 윤태영 대변인은 “(신당에 대한 노 대통령의) 입장을 말하는 게 부적절하다”고 언급했다. 그는 “노 대통령은 당정분리 약속을 지키는 신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이는 오늘날 정치가 이렇게 된 것은 정치인들이 신뢰를 지키지 않은 게 큰 이유라는 판단에서”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노 대통령은 최근 1개월 가량 민주당 관계자들을 비공식적으로 만난 자리에서도 신당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을 나눈 일이 없다고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전했다. 현 시점에서 노 대통령이 정당개혁을 선동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이 부적절하게 여기고 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민주당의 한 축을 이루는 구 주류 및 동교동계의 중심 격인 한 전 대표의 공개 질의를 그냥 못들은 체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노 대통령은 스스로 신당 관여 불가 원칙을 내비치고 있지만 많은 이들이 ‘노심(盧心)의 원격 조종’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를 무시할 경우 오히려 호남지역의 정서가 더욱 반노(反盧)로 치닫게 될 것이란 우려도 포함돼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노 대통령은 5월27일로 예정된 민주당 의원들과의 청와대 만찬에서도 신당문제에 대해 직접 언급은 피하더라도 유인태 정무수석 등 청와대 정무팀의 비공식적 접촉을 통해 신당문제에 대한 ‘방향잡기’가 이뤄질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또 노 대통령이 청와대 만찬에 앞서 한 전 대표를 면담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져 ‘노-한 회동’이 성사될 경우 특단의 해법이 모색될 수도 있을 것이란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5월 마지막 주에는 민주당 의원들의 청와대 만찬(27일)과 신 주류 중심의 2차 워크숍(28일), 민주당 당무회의(30일) 등이 잇달아 예정돼 있다. 신당 창당의 대세를 결정짓는 분수령이 될 한 주다.

염영남 기자

입력시간 2003/05/28 14:28


염영남 libert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