꼼수 보이는 '전깃줄 訟事'

한전vs토공, 전기 간선시설 설치비 둘러싼 4년싸움

전기 간선시설 설치비를 둘러싸고 한국전력(한전)과 한국토지공사(토공)가 벌써 4년째 송사를 벌이고 있다. 택지개발지구에 가공(땅 위)이 아닌 지중(땅 밑)에 전기 간선시설을 설치할 경우 비용을 누가 부담해야 하느냐가 분쟁의 골자다.

“가공 설치에 비해 지중 설치 시 비용 부담이 최대 7~20배에 달한다. 만약 이 비용을 한전이 모두 부담한다면 전기 요금이 3~4%는 인상될 것이다.”(한전) “한전이 독점적 영업 설비에 대해 사업자 혹은 입주자에게 비용을 전가하려는 것은 명백한 횡포다.”(토공) 명쾌한 조정에 나서야 할 정부 부처도 그간 오락가락하며 양측의 싸움을 더욱 부추긴 격이 됐다.


반전에 반전 거듭

분쟁의 시작은 1999년 6월 토공이 한전을 상대로 62억여원 상당의 소송을 제기하면서부터 였다. 당시 주택건설촉진법은 100호 이상의 주택을 건설하거나 1만6,500㎡ 이상의 주택단지를 조성할 경우 전기 등 기간시설 설치 비용은 서비스 공급자가 부담하도록 하고 있었다.

문제는 지상 설치 시에는 한전이 비용을 부담하되 지중 설치 시에는 지상과 지중 공사비 차액에 대해 사업주가 부담하도록 명시하고 있는 한전의 자체 전기공급 약관이었다.

토공측은 “차액을 사업주가 부담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법원에 이미 납부한 비용 62억여원을 되돌려 달라는 반환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2001년 8월 1심 법원이 “지중으로 하든 가공으로 하든 설치 비용은 공급 의무자가 부담해야 한다”며 42억여원의 반환 판결을 내림으로써 논란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하지만 불과 2개월 뒤, 규제개혁위원회(규개위)가 주택건설촉진법 상 전기 공급 설치 의무 조항이 과도한 규제라며 삭제 권고를 하면서 상황은 다시 복잡해졌다. 한전은 주택건설촉진법이 위헌이라며 헌법 소원까지 냈고, 지난 3월에는 산업자원부와 건설교통부가 합의해 규개위 권고안을 받아들여 정부 입법으로 수정 법안을 발의했다. 만약 이 대로 법안이 통과된다면 한전측이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다시 반전됐다. 국회 건교위 법안심사소위에서 수석 전문위원이 규개위 권고안을 무시하는 검토 의견을 낸 것. 결국 4월30일 국회 본회의에서 원래대로 설치 의무 조항을 존속시키는 내용의 개정 주택법안을 통과시켰다.


한전, “혜택은 누가 입는데…”

한전은 막대한 비용 부담을 문제 삼는다. 전국의 모든 택지개발단지에 전선을 지중으로 공급할 경우 연간 무려 6,864억원의 비용이 추가 소요돼 3~4%의 전기요금 인상 요인이 될 것이라는 분석까지 내놓았다.

특히 토공과의 첫 소송 외에도 현재 전국 29개 단지에서 토공을 비롯한 주공, 지자체 등과 13건에 376억원의 소송이 진행되고 있는 데다, 향후 시행 예정인 115개 단지에서도 2,325억원의 추가 소송이 발생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한전측은 “지중 공급에 따른 도시 미관 등의 혜택은 택지개발 사업자나 입주자, 혹은 해당 지자체 등이 보는 상황에서 한전측에 모든 비용을 전가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며 “비용을 부담하려면 공급 방식 역시 한전이 결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밝히고 있다.

입주자간 형평성 문제도 제기한다. 한전 김수철 영업처장은 “주택단지의 미관 개선 등을 위해 가공 선로 공사비보다 7~20배나 소요되는 지중 공사비를 한전이 부담할 경우 일반주택 입주자와의 형평성 문제가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결국 100세대 미만 단지와 개인주택 입주자가 부담하는 공사비 일부를 대규모 단지 입주자에게 보조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이다.

한 관계자는 “정부가 노약자들에게 버스, 지하철 등 대중교통수단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해줬더니 택시를 탄 비용을 지원해 달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꼬집었다. 특히 가스나 난방 등 다른 기간 시설은 원래 지중 설치 외에는 불가능한데 반해 전기 시설만 지중과 지상 설치가 모두 가능하다는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토공, “독점적 공급자가 비용을 전가해?”

토공측은 한전이 소유권을 갖고 있는 영업 설비에 대한 비용을 다른 사람이 지불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는 논리를 편다. 공공성이 강한 전기를 한전이 무료로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유료로, 그것도 독점적으로 공급하고 있는 만큼 설비의 종류와 관계 없이 비용은 한전이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전기 간선시설을 지중으로 할 지 아니면 지상으로 할 지를 결정하는 주체가 택지개발사업 승인권자인 행정 관청이라는 점도 집중 제기한다.

토공 법규제도부 정의중 과장은 “해당 지자체나 건교부가 도시 미관을 고려해 지중 설치를 결정해 사업자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상황에서 비용 차액을 사업자가 부담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도시 미관의 혜택은 사업자에게 돌아간다기 보다는 행정 관청의 정책적 판단에 따른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사업자 비용 부담은 고스란히 분양가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란 지적도 있다. 건교위 법안심사소위에서도 “간선시설 설치 비용을 주택 사업자가 부담하면 결국 분양가가 상승해 입주자만 피해를 보게 될 것”이라는 검토 의견을 냈다. 토공측은 게다가 비용 문제로 협의가 늦어지면 입주자들의 불편을 초래할 것이라고 문제를 제기한다.


지금도 분쟁은 진행 중

현재까지 모든 상황은 토공측에 유리하게 전개돼 왔다. 하지만 한전측은 여기서 물러설 수 없다고 벼른다.

우선 6월4일로 예정된 토공의 반환청구소송 2심 판결이 중대 변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 법원이 어떤 판결을 내리느냐에 따라 현재 계류 중인 다른 소송 뿐 아니라 분쟁 소지가 있는 모든 사안들의 앞날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시금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전측은 “1심 판결과는 달리 쟁점 사안들을 충분히 다룬 만큼 승산이 높다”고, 토공측은 “특별한 변수가 없는 1심 판결을 뒤집을 요인이 없다”고 서로 자신하고 있다.

4월 말 통과된 주택법의 시행령 제정 과정에서도 또 한 차례 공방이 일 것으로 예상된다. 법이 공급 방식에 대한 언급 없이 설치 비용을 한전측이 부담하도록 하고 있지만, 시행령에서는 얼마든지 공급 방식에 따라 부담 주체를 달리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탓이다.

하지만 양측의 오랜 분쟁을 바라보는 여론의 시각은 곱지 않다. 건설업계 한 관계자는 “한전측은 비용 부담을 하게 될 경우 전기 요금을 인상할 수 있는, 토공측 역시 분양가를 높일 수 있는 명분을 확보하려는 것 아니냐”며 “결국 국민들만 고스란히 손해를 떠안는 결과를 낳게 되지 않을 지 걱정된다”고 지적했다.

이영태 기자

입력시간 2003/05/29 13:36


이영태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