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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가 사는 법] 아름다운 팥쥐엄마 김금희

이혼도 소중한 삶의 편린, 재혼, 그리고 당당한 아이 키우기

10쌍의 부부가 결혼을 하면 그 중 3쌍은 이혼한다. 3명 중 거의 1명은 이혼을 하는 셈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편부모 가정이나 재혼가정에 대해 우리 사회 일반이 알고 있는 것은 별로 없다. 그저 쉬쉬하면서 뒤로는 그 부모들이 뭔가 남다른 문제가 있을 것이라 지레 짐작하고, 재혼이란 뭔가 아쉬운 것이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것으로 여긴다.

누대를 걸쳐온 이 편견에 대해 한 남자를 사랑함으로써 그의 아이들까지 껴안는 것이 재혼이라고 김금희(38)씨는 당당하게 말한다. 그리하여 고약한 계모임에 틀림없으리라는 편견에 대해서도 ‘팥쥐 엄마는 없다’(친구미디어刊)며 누구나 눈치보고 쉬쉬하는 재혼가정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놓았다.

‘남의 아이 키워야 공 없으니 기대하지 말라고 그래요. 근데 저는 기대하면서 키워요.’라고 힘주어 말하는 여자 김금희. 그녀가 ‘꼴찌’에서 ‘엄마’로 거듭나는 이야기는 왠지 다를 것 같았지만 다른 세상의 엄마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꼴찌의 첫 결혼과 시련

오빠와 언니 밑으로 난 셋째.‘꼴찌’는 딸을 그만 낳으라는 의미로 붙여진 김 씨의 어릴 적 별명이다. 별명에도 불구하고 밑으로 여동생을 보았지만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도 그녀를 ‘꼴찌’라고 불렀다.

“우리 아빠가 저를 키울 때 현모양처 그런 게 아니라, 독일에서 우리 기계 고쳐주는 엔지니어가 들어왔는데, 여자더라, 너무 멋지더라, 허리에 공구 차고 기계 밑에 들어가서 보는데 너무 멋지더라, 오늘 병원 갔더니 의사가 여자더라, 우리 꼴찌 의사하면 멋있겠더라. 뭐 이런 얘기를 했지, 한번이라도 나한테 간호사, 학교선생님 이런 거 하라고 안 하셨어요. 어렸을 때도 딴 애들 다 머리 기르고 그럴 때, 너는 한번 이렇게 잘라보자, 이래가지고 커트치고 다니고 그랬어요.”

이런 아빠의 영향이었을까, 꼴찌는 불혹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그럼, 난 뭐야?’, ‘내 일을 하고 싶어!’하는 생각을 놓치고 산 기억이 없다.

그녀는 항상 뭔가 일을 해야 했고, 이른 결혼을 하고도 1년 남짓을 빼고는 전업주부로 살았던 적이 없다. “처음 큰 아이 낳고 1년 동안 흔히 말하는 시집살이를 했어요. 전혀 환경이 다른 시골에 가서. 그 때 제가 많이 위축됐었거든요. 친구도 다 잃어버리고.”

그녀는 결혼으로 직장과 친구, 가족 등 이전의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잃어야 했다. 당시 그녀와 아이들의 친부는 어린 나이에 ‘사고를 친 것’이었고, 아이의 친부의 신분은 군인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친부가 제대할 무렵까지 친부의 고향집에 머물러야 했던 것.

“사고를 칠 정도로 대범했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대범해야 되는데, 제가 크리스천이에요. 그래서 흔히 말하는 병원 가서 처리하고 이런 게 안 되는 거니까. 그 당시 저희 엄마는 (그 사실을 알고) 엄마가 교회를 갈 거니까, 엄마가 교회에 갔다 온 다음에 네가 이 집에 없었으면 좋겠다, 굉장히 냉정하신 분이거든요. 그래서 진짜로 엄마 교회 간 사이에 쇼핑백에 짐 싸갖고 나온 거예요.”

그녀가 고등학교 2학년 되던 해 돌아가신 아빠를 대신해 혼자 4남매를 책임지고 사셨던 그녀의 엄마, 별명이 장군의 딸인 그녀의 엄마는 혹독하리만치 냉정하게 책임을 물었다.

“동네에서 그렇잖아요. 직장 잘 다니던 딸이 안 보이더니, 어느 날 갑자기 애기 안고 나타나는 거니까 엄마 입장에서도 굉장히 용기가 필요했을 거 같아요. 그 당시는 거기까지 생각을 못 했지만요..”

그러나 딸이 첫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에 병원으로 찾아오고, 편편치 않았을 시집에서의 몸조리가 끝날 무렵 지나가다 보았다며 예쁜 아기 옷을 보내주시며 늘 한 쪽으로 비켜나서 그녀의 삶을 지켜주신 어머니였다. 그렇게 혼자 첫 아이를 낳고, 친부가 군대를 나오면서 본격적인 결혼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녀의 상황은 예상 밖으로 더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물어보잖아요, 신랑이 때렸어? 바람 피웠어? 근데 그런 거 아니야, 그러면 그 다음엔 그럼 니가 뭐가 있겠구나, 거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래요. 특히 여자들끼리가 더 하죠. 앞에서는 이해한다 말하고 뒤에 가서 딴 말하는 거 너무 많았고요.

그리고 이혼하는 이유 자체가 ‘내가 존경할만하지 못해서, 그게 싫어서 이혼했다’고 말하면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뭔가 구체적으로 치고 박고 싸우든지, 누가 불륜이 있든지, 경제적으로 부도가 났다든지, 이런 거여야 이혼을 한다고들 생각하거든요. 단지 이 사람하고는 단 10분도 더 이상 얘기할 수 없는 상황을 이해를 못해요.

같이 누워있으면 가슴으로 바람이 팍 지나가는, 그리고 급하면 엄마한테 전화해 볼까, 누나한테 전화해 볼까, 이런 사람이랑 살았어요. 이런 사람하고 평생 살 생각을 하니 너무 아뜩했어요. 이런 걸 20대 후반부터 느꼈거든요. 남편은 일 안하고, 지금 당장 편하게 살길 원했어요.”


형벌의 시간을 벗고 엄마로 거듭나다

하루 24시간 중 한 2, 3시간만 비는 시간이 있어도 뭔가, 하다못해 운동이라도 해야 되는 그녀의 실수에 대한 책무는 너무 무거웠다. 12년간의 형벌 같은 시간을 그녀는 아무런 준비 없이 정리했다. 아이를 키울 경제력이 없는 엄마는 아이들을 데려와야 한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세일즈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일까지 바쁘게 뛰었다.

“저랑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작은 아이가 1학년 입학을 했고, 큰아이가 5학년 에 올라가 있었죠. 큰 아이가 그래도 역할을 했죠. 8개월 애들 떼어놓았을 때, 내가 못했던 거, 내가 애들을 찾아오면 이렇게, 이렇게 해야지, 뭐 이런 마음고생을 한 1년 하고 나면 그 다음에 애들을 만나니까, 내 행동을 자꾸 돌아보게 되요.

그 부분이 아이들한테는 끝까지 가져갈 상처긴 한데, 그래도 그 시간이 우리한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다면 그런 부분일 거예요. 애들한테 못했던 부분을 1년 동안 내내 발견하는 거예요. 애를 내가 왜 그렇게 키웠을까 이게 아니라, 사소하게. 몇 년 전 그 날 아침, 엄마 나 밥 먹기 싫은데 빵 먹고 가면 안 될까 했을 때, 내가 왜 그렇게 했을까. 이렇게 구체적인 것들이 생각나요.

다음에 애들 오면 이런 거 안 해야지, 그런 것들. 지금도 애들한테 잔소리 하다가도 아, 내가 절대로 당장 아이들 목숨이 오가는 거 아니면 ‘안 돼’소리 안 하기로 했는데, 크게 큰일 나는 게 아니면 일단 ‘안 돼’ 소리 안 하기로 했는데, 그게 참 안되잖아요, 그죠?”

세인들의 눈에 짐이거나 혹일 수밖에 없는 딸아이들에 대한 자신의 위치를 이혼을 하면서 더욱 명확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혼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 당연히 내가 우리 애들 찾아온다고 할 때, 우리 엄마가 울면서 말렸어요. 어떻게 됐든 크면 너 찾을 텐데, 너 평생 혼자 살 거냐? 여자 딸 둘 달린 거 혹이잖아요, 그죠? 혼자 살 생각이니까 데리고 온 거고. 저도 옛날에는 애들 키우는데 그렇게 의미 두고 그러지 않았어요, 너무 젊어서 엄마 됐으니까, 근데 제가 한 8개월 애들 떼어놓았을 때, 그럴 때 엄마로서 철이 드는 거예요.”

그리고 그 와중에 입학한 방통대학 경영학과에서 2살 연하의 현재 남편을 만났다. 그 역시 이혼의 상처를 안고 있었고, 전 와이프가 곧 결혼하는 바람에 당장 아이를 데려와야 하는 처지였다. 그것도 셋을. 그는 엄마 없이 아이를 키우는 일에 엄청난 부담을 갖고 있었고, 겁을 내고 있었다.

“이 사람도 남자치고는 굉장히 빨리 아빠가 된 편인데, 이혼하고 그 1년 아이들 떼어놓고 마음고생이 많았죠. 지금 보면 굉장히 좋은 아빠예요. 그러니까 내가 말하면 대답 안 할 정도로 피곤한 상태에서도 애들이 물으면 백번이면 백번 다 대답할 정도로요.

그 당시 지금 남편은 애들 때문에 재결합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근데 제가 열심히 말렸어요. 제가 그 사람한테 흑심을 품고 말렸으면 제가 나쁜 사람인데, 그런 게 아닌 상태에 말렸어요. 왜냐면 진짜로 싸울 만큼 싸우지 않고는 이혼을 못 하거든요.

그 깊은 상처가 있는데, 애들이 상처받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둘이 관계가 회복될 수 있으면 재결합을 하지만 애들 때문에 하는 거라면 하는 거 아니라고. 그리고 두세 번 재결합 해보려고 들어갔었어요. 그러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고 하면서 여자도 혼자 키우는데, 남자가 왜 혼자 못 키우겠나, 이러면서 그때부터는 구체적으로 물어보더라고요.

아침에 애들 밥 어떻게 해서 먹여 보내나, 우리 막내 받아줄 놀이방이 있겠느냐, 자기가 저녁에 늦게 들어오면 우리 애들 어떻게 해야 하냐. 그러면 제가 아주 쉽게 얘기해주잖아요. 우리 동네 그 김밥 먹을 만 해, 괜찮다고.”


서로의 아이들 받아들이기

그녀 말대로 흑심(?) 없이, 아이 키우는 노하우를 알려주는 관계로, 2살 연하의 남편과의 교제가 시작되면서 자연스럽게 양쪽의 아이들과의 만남도 자주 이어졌다. 그렇게 1년의 시간을 실험한 끝에 드디어 양가의 ‘합병’을 현실화했다.

“조건 때문에 결혼하는 거에 대해서, 저도 처음 조건으로는 이 사람 너무 안 좋았어요. 애 셋 딸렸지, 위자료 다 주고 사업체 말고는 재산 하나도 없고. 근데 사람의 어떤 부분만 만나서 결혼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근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남자가 나를 너무너무 사랑해, 다만 내 아이들을 받아들이지 못할 뿐이야, 라고 생각하고 결혼하는 여자들이 많은데, 이건 진짜 안 된다고 생각해요.”

어떤 사람의 일부분이 아니라 두 사람의 전 인생이 만나는 것이 바로 결혼이라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따라서 재혼하는 사람들의 결혼엔 이전 결혼을 통해 얻은 아이들과 경험들을 고스란히 만나는 일이다.

“하나도 안 힘들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긴 하지만 견딜만했어요. 힘들어하는 엄마들,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라고 하고 싶어요. 내가 좋은 엄마이고 싶어서 내 목소리, 내 생각, 내 기분 다 누르고 아이들을 대하잖아요, 그건 아이들한테서 보면 진실이 아닌 거고, 엄마입장에서 보면, 지치는 거니까 잘 하려고 애쓰지 말고 솔직해지라고 하고 싶어요.”

양은주 자유기고가 wayfar@hanmail.net

입력시간 2003/05/29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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