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문흥수 서울지법 부장판사

"인사개혁 없이 사법개혁 없다"

1999년 2월, 법관 전용 통신망에 장문의 글이 올랐다. 업무와 관련한 글이거나, 혹은 시시콜콜한 사담이려니…. 그런데 제목이 심상찮다.

‘진정한 사법 개혁을 바라는 국민들께 드리는 글’이라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전 이종기 변호사 수임 비리 사건이 터진 직후였다. 법원이 거물 변호사 양성소라느니, 재판중에 눈치 안 보면 어리석은 판사라느니 하는 표현 하나 하나가 도발적이다. 언론에까지 대서특필되고 보니 주변의 시선이 고울 리 없다. 수근거림이 시작됐다.

“너무 튀는 것 아냐?” “겁도 없이….” 일개 법관이 사법부라는 거대 조직과의 길고 긴 싸움을 시작한 사건이었다.

벌써 4년도 넘게 지났다. 헌데 법관 문흥수(서울지법 민사항소1부 부장판사ㆍ사시 21회)는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어지간하면 제 풀에 지쳐 포기할 법도 하련만. 2001년엔 법관 33명과 함께 사법 개혁을 위한 법관 공동회의를 발족시켰고, 이듬해엔 법관 인사 제도가 위헌이라며 헌법 소원을 제기했다.

그리고 이번엔 현직 판사 26명의 연명을 받아 대법원장 앞으로 집단 건의문을 제출했다. 요구 사항도 한결 같다. 법관 의견 개진 통로 확립, 피라미드식 인사 제도 탈피, 법관 인사의 공정성과 투명성 확보 등등.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는 속담이 맞는지, 아니면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속담이 맞는지 집요한 시험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요즘 분위기만 보면, 어쩐지 계란에 맞은 바위에도 금이 갈 수 있을 것같다. 그를 만나 진솔한 이야기를 듣고 보니 더더욱 그렇다.


인사는 만사다

통영지원 형사단독 판사로 재직하던 88년이었다. 이적표현물 제작ㆍ반포에 관한 죄를 규정하고 있는 국가보안법 7조5항에 대해 위헌 제청 결정을 내렸다. 군부 독재가 막을 내린 뒤였지만 그래도 서슬이 퍼렇던 시절이었다.

“지원장, 법원장, 안기부 요원들이 돌아가면서 직간접적으로 압력을 가해왔어요.” 구체적으로 무슨 얘기를 해왔는지에 대해선 입을 닫았다. 가늠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당신 그러다가 옷 벗을 수 있어.” “뭐 하러 쓸 데 없이 벌집을 쑤셔놓고 그래. 그러다가 승진에서 누락되면 당신만 손해지 뭐.” ….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이 흘러도 주변 환경은 비슷했다. 97년 YS 정부 말기, 노동관계법과 안기부법 국회 날치기 사건에 대해 역시 위헌 제청 결정을 내렸다. 어김없이 주변의 압력에 밤잠을 설쳐야 했다. “법관이 승진을 의식하기 때문에 압력을 느낀다고 생각했죠. 만약 평생 임기만 보장된다면 누구나 소신 대로, 법관의 양심에 따라 판결을 할 수 있을 거라고요.”

인사는 만사라고 했다. 이런 체험에서 비롯된 그의 사법 개혁 방향은 그래서 인사 개혁으로 귀결된다. 만인의 선망 대상이라는 법관의 일생을 보자. 사법연수원에서 50등 안에는 들어야 마음 놓고 지원할 수 있는 법관의 출발은 누구나 지방법원 혹은 지원의 합의부 배석 판사다. 부장판사로부터 훈련을 받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는 단독 판사, 고등법원 합의부 배석 판사, 지법 부장 판사의 단계를 밟는다. 치명적인 하자가 없다면 여기까지는 예정된 수순이다. 물론 서울이냐 지방이냐, 민사냐 형사냐의 차이는 있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법원 인사의 꽃’이라는 고등법원 부장부터는 아무나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그간 상급자로부터 좋은 근무 평정을 받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윗사람들 눈에 거슬릴만한 ‘문제의 판결’을 내린 적이 있다면 치명타다. 자신을 이끌어 줄 ‘인맥’이 있어야 하는 것도 공공연한 비밀이다.

“고등 부장이 되면 명예와 돈을 한꺼번에 거머쥘 수 있죠. 언제 법복을 벗더라도 변호사로 개업하면 전관예우를 톡톡히 받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가 올 초 고등 부장 승진에서 밀렸고, 지금껏 형사부에는 좀처럼 배치되지 않았던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닐 듯 싶다. 그래서 “현 인사 제도가 기득권을 위한 시스템”이라는 그의 주장은 충분히 수긍이 간다. 기득권층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법관을 양성하고 다시 그들이 기득권층이 돼서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사법부를 지탱해 나간다는 것이다.


벽은 반드시 뚫는다

그인들 거대한 벽의 높이를 모를 리 없다. 아니, 누구 보다 더 잘 알고 있을 터다. 법원행정처나 대법원의 ‘높으신 분’들에게 그는 언제나 ‘눈엣 가시’였다. 그래서 번번이 그의 주장은 공허한 메아리로 되돌아왔다. 아니 냉소와 압력으로 되돌아왔다. “제가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이들과 언제 어떤 자리에서 같이 일하게 될 줄 누가 알겠습니까. 제가 제 무덤을 스스로 파고 있는 것이죠.”

이번 건의문에 연명을 받는 과정만 해도 그렇다. 당초 100명 가량의 판사들이 참여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막상 이름을 적는다고 하니 상당수가 몸을 움츠렸다. 26명이라는 숫자도 결코 적지않음은 틀림없지만 말이다.

벽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의 도전 의식은 더욱 강해지는 모양이다.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판사들의 선택을 인정합니다. 바로 그래서 그 현실을 바꿔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현실 장벽 탓에 행동으로 옮기지만 못할 뿐, 실제 마음으로는 법관 대부분이 그를 비롯한 개혁 판사들의 주장을 지지할 거라는 믿음이다.

“실제 토론회에 나가면 참석한 학자들이나 시민단체, 그리고 언론 관계자들의 95% 이상이 제 의견이 동의해 줍니다. 대부분의 판사들도 마찬가지죠. 오직 법원행정처와 대법원 수뇌부, 즉 기득권층만 뒤에서 저희를 비난하고 있는 겁니다.”

참여 정부 출범이라는 주변 환경 변화에 대한 기대도 크다. 3월 말 대법원이 법관인사제도 개선위원회를 발족시킨 것만도 상당한 변화다. “위원회가 보수적인 인사들로 이뤄졌다”는 아쉬움은 여전히 남지만 그래도 기대는 버리지 않는다.

“위원회 발족도 어찌 보면 저희들의 이런 요구가 받아들여진 자그마한 결실이 아니겠습니까. 민변이나 참여연대 등 저희들의 생각에 동조하는 시민단체의 영향력도 강해졌습니다. 대화와 타협을 중요시하는 참여 정부 5년 내에는 저희들의 요구가 결실을 맺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고지식한 그는 생활도 고지식하다. “법원과 교회를 오가는 것이 전부”라고 했다. 그래도 판사인데 선후배 변호사들과 술 한잔 정도는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의 대답은 “살고 있는 신림동 아파트 주변에서 고시촌 선교를 하는 변호사들과 모임을 갖는 게 전부”란다.

후배 법관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 듯했다. “법관으로서의 참된 행복과 긍지를 위해 법관 생활을 하십시다. 치사하고 비굴하게 윗사람들 눈치를 보며 소신을 꺾지 마시고.” 그가 자처해서 외롭고 힘든 투쟁을 하는 변이기도 했다.

이영태 기자

입력시간 2003/06/11 14:46


이영태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