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정몽준 "정치는 해야 할텐데"

정계개편 예의주시, 기존정당 이탈세력과 연대할 수도

6월8일과 11일, 한국과 우루과이, 한국과 아르헨티나의 축구대표팀 친선경기가 열린 경기장 본부석 스탠드에는 낯익은 얼굴이 TV 카메라에 클로즈 업 됐다. 지난 12ㆍ19 대선에서 한때 후보간 지지율 1위까지 올라 대권의 부푼 꿈을 꾸다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국민통합 21 정몽준 대표였다.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죄(?)로 대선후 미국으로 장기외유에 떠났던 그가 6월8일 미국 생활을 접고 영구 귀국했다. 미국 스탠퍼드대 국제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하기 위해 홀연히 떠난 지 꼭 4개월 만이다.

대구 지하철 참사 유가족 위로겸 선친인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기일에 맞춰 지난 3월 귀국했다가 4월에는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한국과 일본 대표팀 친선경기를 참관하기 위해 잠시 들렀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미국 보따리’를 싸서 돌아왔다.

그는 미국에서 조지 슐츠 전 국무장관과 마이클 아마코스트 전 국무부 차관과 접촉하는 등 북핵 사태를 비롯한 한반도 문제를 집중 연구했으며, 같은 대학에서 명예교환교수 자격으로 연구활동 중인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와는 공식적으로 회동을 갖지 않았지만 우연히 인근 식당에서 조우해 가볍게 인사만 나눴다고 한다.

그는 아직도 공당(의석수 1개의 미니정당이지만)의 대표로 대선 후보까지 올랐던 4선 의원이면서 ‘대~한민국’ 신드롬을 자아낸 월드컵 4강의 주역 중 하나인 대한축구협회장, 또한 현대 가(家)의 아들로서 부여 받은 현대중공업의 사실상 오너이며 울산대학교 이사장직도 맡고 있다. 정치인이면서 경제인, 그리고 축구인이기도 하다. 이런 그의 귀국에 벌써부터 정ㆍ재계와 스포츠계에서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물론 1인 3역의 정 대표가 걸어가야 할 길은 ‘정치인 정몽준’이다. 미완의 꿈으로 남은 국민통합 21도 아직은 외연상 정당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한 측근은 “정 대표가 당장 정치적 행보를 보인다던가 또는 현대중공업 경영에 직접 참여하던가 하진 않겠지만 축구협회장으로서의 공적인 업무에 복귀한 이상 소속 정당을 포함한 주변 문제부터 하나씩 차근차근 풀어갈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국민통합 21, 신낙균 대표체제로 전환할 듯

국민통합 21은 여의도 국민일보 사옥 건물에 1개 층을 임대해 쓰고 있다. 오가는 사람들도 없고 들끓던 보도진들도 대부분 철수한 상태라 썰렁한 분위기이다. 대선 때만 해도 3개 층을 쓰면서 당직자 및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밀려드는 방문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던 시절에 비하면 ‘아 옛날이여’가 아닐 수 없다.

당을 지키는 당직자들 수도 대선이후 급격히 줄어들어 이젠 전직 의원들을 비롯한 중량급 정치인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이철 전 의원은 대선 당일 지지자들과 탈당했고 대선이후 정미홍 김행씨 등 여전사들은 현업으로 복귀했다.

박범진 김민석 전 의원 등도 짐을 싸 당사를 나갔다. 김 전 의원은 최근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대선 후보로서의 정몽준 의원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며 한 때 모셨던 정 대표를 몰아세우기도 했다.

현재 당은 신낙균 전 장관이 대표권한대행체제로 운영되고 사무총장 역할에는 이인원 당무조정실장이 맡고 있다. 의원회관에는 이달희 보좌관이 줄곧 정 대표의 의정활동을 거들고 있다.

정광철 특보에 따르면 정 대표가 당장 정치 행보를 본격화하기보다는 국회가 열려 있는 만큼 국회쪽에 전념하다 6월 중에 전체 당무회의를 열어 당 체제를 신낙균 대표체제로 전환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아직 정 대표의 직할체제로 가기에는 이르다는 판단에서다.

정 대표는 일단 신 대표대행을 전면에 내세워 당을 유지하되 민주당의 신당 창당 여부와 새로운 대표체제 이후의 한나라당의 변화상 등을 두루 지켜본 연후에나 정계 일선에 복귀할 계획인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 이합집산 따른 합당 등의 변수 주목

정 대표는 과거 두차례 귀국시 향후 정치적 진로에 대한 질문에 “유권자들의 뜻에 따를 것”이라며 사실상 정치재개 의사를 밝힌 바 있다. 지난해 대선 막판 ‘지지철회’ 파동으로 정계은퇴 위기로까지 내몰렸다가 미국 외유 등으로 일단 ‘소나기’는 피했다고 보는 듯 하다.

하지만 이미 정치적 상처를 입을 대로 입은 정 대표 입장에서 내년 총선을 앞두고 자력으로 재기하기에는 대외적 여건이 만만치 않다. 결국 정 대표와 국민통합 21이 선택해야 할 길은 정계개편 등에 따른 정치권 이합집산의 와중에서 기존 정당과의 합당이나 새로운 정치세력과의 연합을 통하는 것이 가장 성공 가능성이 높은 길로 보인다.

각론에 들어가서는 집권 여당인 민주당과는 일정 부분 금이 간 상태라 그 반대 편에서 나아갈 길을 모색하지 않겠느냐는 전망이 조심스레 나오고 있다.

노 대통령은 5월30일 언론사 편집·보도국장 간담회에서 장수천과 부동산 문제를 얘기하며 “보증인에게 손해를 입혔다. (하지만) 정몽준 대표와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 않으냐”고 말하기도 해 정 대표에 대한 감정이 남아있음을 내비쳤다. 정 대표 입장에서도 이념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노 대통령 친위 세력과는 쉽게 손잡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하지만 민주당 구 주류하고는 관계가 나쁘지 않다. 후단협 활동을 하면서 사실상 정 대표를 후원한 인사들이 대부분이고 보수적 성향도 그리 틀리지는 않은 데다 신낙균 대표대행도 이쪽과 코드가 맞는다. 다만 지역적으로 호남 중심인 점이 울산 지역구인 정 대표에게 부담이면 부담이다.

가장 관심 있게 지켜 볼 대목은 역시 한나라당의 대표 경선이다. 누가 되느냐에 따라 당이 쪼개지거나 일부 부스러질 가능성도 있는 상황이라 정 대표 측도 이를 주시하고 있다. 한나라당의 균열을 틈 타 이들 세력과 연대나 연합전선을 구축한다면 새로운 모습으로 내년 총선에 임할 수도 있다는 계산에서다.

아니면 민자당에 몸담았던 옛 정을 떠올려 한나라당과 손잡는 방안도 강구해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지금의 한나라당이라면 현실성이 부족해 보이고 결국 새로운 대표가 선출된 뒤 당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한번쯤 시도될 수 있을 것 같다.

염영남기자

입력시간 2003/06/18 10:43


염영남 libert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