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夏鬪몸살… 대한민국은 신음 중

명분 잃은 집단이기주의 만연, 국가경쟁력에 치명적 결과 불러

6월21일 밤 10시. 이용득 금융산업 노조위원장과 최영휘 신한금융지주 사장이 서울 명동 은행회관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세 번째 협상. 하지만 마지막 협상이기도 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고 판단한 정부는 “21일 자정까지 협상이 타결되지 않으면 공권력을 투입한다”는 최후통첩을 한 상태였다.

조흥은행 노조 집행부는 공권력 투입에 대비해 노조원들의 이동 경로를 재점검하는 등 파업 시계는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협상 타결에 실패하면 공권력이 곧 투입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셔터가 내려진 조흥은행 본점 농성장 밖에는 안부를 걱정하는 가족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협상 시작 4시간 가량이 지난 22일 새벽 1시40분. 정부와 신한지주 측이 제시한 협상안을 놓고 노조측이 찬반 투표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고무적인 신호였다.

그리고 다시 1시간 가량 지났을 즈음. 농성장에 웅성거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협상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기자들이 분주히 노트북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협상 타결’이라는 제목의 1보를 타전한 것은 협상 시작 5시간 만이었다.


조흥 파업은 올 하투 가늠자

사상 초유의 전산망 마비 위기까지 치달았던 조흥은행 총파업 사태가 나흘 만에 최종 타결됐다. 말이 협상이었지 결과는 노조의 완승이었다.

▦조흥은행 3년간 독자 경영 보장 ▦3년간 고용 보장 ▦3년간 신한 수준까지 임금 단계 인상 ▦통추위 및 지주사 내 임원 비율 양측 동수 구성 등 사실상 노조가 원한 것은 모두 얻었다. 그들이 겉으로 내세웠던 ‘분할 매각’이 관철될 수 있을 거라고 믿은 노조원은 아무도 없었을 테니까. 외양상 최후 통첩을 한 것은 정부였지만, 애초부터 주도권은 조흥 노조측이 쥐고 있었다.

“주말을 넘기면 전산망 마비가 현실화할 수 있다”는 우려는 정부를 다급하게 만들었다. 공권력을 투입하겠다고는 했지만 줄줄이 예고된 ‘하투(夏鬪)’를 앞둔 엄포에 불과했다.

조흥은행 파업 사태가 주목을 받은 것은 그 자체의 파괴력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올 ‘하투’의 추이를 짚어볼 수 있는 가늠자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조흥은행 파업은 화물연대 파업 사태 당시 정부의 ‘완패’ 이후 첫 파업인 동시에 대대적으로 예고된 올 하투의 시발이었다.

조흥 노조가 최후 협상 테이블에 앉았던 21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교육행정정보화시스템(NEIS) 도입에 반대하며 격렬한 연가 투쟁에 나섰고, 부산ㆍ대구ㆍ인천 지하철 연대 파업(24일), 한국노총 총파업(30일), 민주노총 금속연맹 화학연맹 총파업(7월2일), 보건의료 노조 파업(9일) 등 대규모 파업이 줄줄이 예고돼 있었다.

첫 스타트를 끊었던 조흥 노조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것은 다행이었지만 상처는 너무 컸다. 파업 나흘 새 은행에서 7조원 가량의 자금이 빠져 나가며 향후 상당한 후유증을 안게 됐다.

무엇 보다 화물연대 파업에 이어 또 다시 정부가 ‘힘’에 굴복한 듯한 인상을 심어준 것은 치명타였다. 이쯤 되고 보니 “떼를 쓰면 무조건 얻을 수 있는데 누가 바보처럼 가만히 앉아 있겠느냐”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 올 하투가 몰고 올 사회적, 경제적 파장이 심상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사측은 비켜라, 정부와 상대하겠다

올해 노동계 파업의 특징은 노사(勞使) 대립보다는 노정(勞政) 대립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임금ㆍ단체협약 갱신에 무게를 뒀던 과거와 달리 노무현 정부 들어 노동 운동의 방향이 ‘대 정부 투쟁’에 맞춰진 탓이다.

조흥은행 매각 반대 파업의 경우 사(使)가 곧 정(政)이었다. 정부가 조흥은행 지분 80%를 보유한 주인이기 때문이다. 조흥은행 노조의 눈은 아예 정(政)을 넘어서 청(靑)을 향했다. 독자 생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면서 걸핏하면 청와대, 혹은 노무현 대통령을 걸고 넘어졌다.

전교조의 집단 연가는 NEIS 관련 노정 합의 파기에 대한 항의다. 그렇지 않다 해도 공무원들인 교사들로서는 협상 대상이 정부가 될 수밖에 없다.

산별노조 등 일반 노조의 요구안도 정부가 추진 중인 제도 개선 사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24일부터 파업에 들어갈 부산 등 3개 지방 지하철 노조 역시 처음부터 ‘1인 승무제 철폐’ 등 대정부 요구안을 내걸고 있다. 애초 한국노총의 6ㆍ30 총파업도 사측과는 무관한, 조흥은행 노조 파업 지원의 성격이 짙었다.

전통적인 의미의 임단투는 7ㆍ2 민노총 금속연맹과 화학연맹 산하 노조의 파업 뿐이다. 하지만 민노총 역시 경제특구법 철폐를 필두로 비정규직 차별 철폐, 주5일제 근무제 쟁취 등 입법적 조치가 필요한 사안들을 요구 사항으로 내걸고 있다. 그만큼 이번 하투가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했고, 정부로서는 얻을 것은 없고 잃을 것만 있는 싸움이라는 얘기이기도 했다.


파업에 명분이 없다

재계를 필두로 한 보수 여론은 연일 노동계를 향해 포화를 퍼붓고 있다. 우리 경제를 볼모로 삼고 있다는, 그래서 경제가 좋아질 때까지는 노동계가 양보해야 한다는 지적도 보수 이데올로기의 산물일 수 있다.

하지만 표출되는 형태가 파업으로 동일할 뿐 내용은 같지 않다. 노동 운동은 정당한 명분만 있다면 그들의 당연한 권리다. 중요한 것은 명분이다. 노동자가 약자이기 때문에 모든 행위 자체가 용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이기심 탓에 또 다른 약자가 고스란히 피해를 감수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주인인 국민으로부터 최소한의 공감대도 얻지 못한 조흥은행 노조의 파업은 집단 이기주의의 극치다. 2조7,000억원이라는 막대한 국민 혈세를 수혈받은 조흥 직원들이 ‘민족 최고(最古)의 은행’을 운운하며 대주주인 정부(사실상 국민)을 향해 독자 생존이나 고용 보장 등을 권리처럼 내세운 것은 누가 봐도 정당성이 없다.

한 시중은행 임원은 “국민과 주택은행 노조가 2년 전 합병에 반대해 파업을 벌인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이라며 “그들은 우량은행을 정부가 강제로 합병하려고 한다는 최소한의 명분을 갖추고 있었지만 공적자금이 투입된 조흥은행은 사정이 전혀 다르다”고 지적했다.

심지어 시민단체 조차 등을 돌렸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파업이 진행 중이던 19일 성명을 통해 “조흥 노조도 국민의 혈세를 투입케 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만틈 극단적 행동을 자제해야 한다”며 “매각 방식 등을 이유로 노조가 고객 불편을 초래하며 파업을 강행한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밝혔다.

내부 단속에 실패한 한국노총이 올 하투를 세력 확대의 기회로 활용하고 있는 것 역시 비판의 대상이다. 지하철 노조들이 한국노총을 이탈해 민주노총에 둥지를 틀면서 온건 노선에서 강성으로 급선회, 명분도 없는 조흥은행 파업을 부추겼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또 다시 빌미 제공한 정부

“정부가 해서는 안되고, 할 수 없는 사안에 대해서 이해집단에게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 국내 주요기업 최고경영자(CEO)들로 구성된 한국CEO포럼은 최근 성명을 통해 정부의 분명한 입장 표명을 요구하고 나섰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재계에서 직접 나서서 정부를 향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는 처음이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정부가 국민에게 청사진을 잘못 제시하거나 달성 불가능한 기대를 심어줬다면 지금이라도 바꿔야 한다”며 “정부는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고 정부의 역할은 글로벌 스탠더드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재계의 지적대로 참여 정부 스스로 화를 자초한 측면이 적지 않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 조흥은행 노조 대표를 만나 독자생존 여부를 판단하겠다고 했고, 합리적 논의조차 없이 청와대 주최로 매각 관련 토론회를 연 것은 노조의 무리한 주장을 조장한 셈이 됐다.

또 화물연대 파업 당시 힘에 굴복해 일방적으로 양보하는 전례를 남겼고, NEIS 도입과 관련해 수시로 말을 바꾸는 등 우왕좌왕하며 전교조측에 빌미를 제공했다.

사태가 심상찮게 돌아 가면서 최근 노무현 대통령의 노동운동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재계 총수들과 직접 만나 ‘집단행동에 대한법과 원칙에 따른 대처’ 입장을 밝힌데 이어, 19일 청와대 수석ㆍ보좌관 회의에서는 정당성이 없는 파업에 대해서는 강경 대응 방침을 분명히 했다.

“과거에는 노동운동이 생존권이나 사회 민주화 운동 차원에서 이뤄져 정당성을 가졌으나 최근에는 일부 노동 운동이 도덕성과 책임성을 잃어가고 있어 우려스럽다. 정부는 노조 주장의 부당한 측면에 대해서는 소신을 갖고 당당하게 대응해 나갈 필요가 있다.”

하지만 불과 이틀 뒤, 조흥 노조와의 협상 과정에서 또 다시 ‘원칙 없는 양보’를 함으로써 이번 다짐도 결국 엄포에 그치고 말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올 하투는 사상 유례없이 사회ㆍ경제적으로 대혼란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학교 수업이 차질을 빚고, 지하철과 철도가 멈춰 서고, 산업 현장이 마비되고…. 전경련 관계자는 “한국노총이 온건 노선에서 강성으로 돌아선 것도 정부가 힘에 굴복하는 인상을 심어줬기 때문”이라며 “정부 스스로 올 하투의 과격성을 부추긴 격이 됐다”고 꼬집었다.

일각에서는 현 정부의 태생적 한계를 지적한다. 한 민간 경제연구소 관계자는 “노 대통령이 여전히 노동계가 자신의 지지 세력이라는 인식을 기반으로 정책을 펴는 한 노동운동에 대한 대응은 일관된 방향성을 갖기 힘들다”며 “노동운동의 옥석을 가려 대처할 때만 진정한 사회 통합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거꾸로 말해 무원칙하고 무소신한 대응으로 일관할 경우 사회 통합은 물 건너 갈 것이라는, 경제 불안이 가속화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이영태 기자 ytlee@hk.co.kr

입력시간 2003/06/24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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