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여성 이야기] 평강공주

공주의 벤처정신이 장군을 만들었다

History, 즉 역사는 그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his story-그의 이야기란 의미를 가진다. 그만큼 인류의 역사는 남성 중심으로 쓰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인류의 반은 여성이며 역사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간 여성들이 없었다면 history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남성을 중심으로 쓰여진 역사 속에서도 그 족적을 뚜렷이 남긴 여인들이 있다. 그녀들은 역사의 중심에 서서 스스로의 역사를 쓰고 스스로 역사에 남은 사람들이었다. 그 여인들을 통해 history 속에 감춰진 herstory, 즉 여성의 역사를 가늠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어떤 남자를 고를 것인가?-평강공주에게 배운다

최근 들어 연상연하 커플들이 많아지는 추세다. 또 여자가 사회적이나 경제적으로 남자보다 형편이 좋은 경우도 많다. 남자를 통해 신분 상승을 이루려는 신데렐라의 꿈은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다. 요즘 여성들은 왕자비가 되어봤자 평생 자존심이나 깎아먹으며 살 거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가능성 있는 바보를 골라 가르치고 돌보면서 성장시키는 것이 더 의미 있다고 느낀다. 바보는 고마운 그녀를 왕자와 결혼한 공주 보다 더 공주처럼 존중해줄 것이다. 평강 공주처럼 말이다.


울보공주 집을 나오다

평강공주의 남편은 ‘바보 온달’이다. 그런데 바보 온달은 실제 역사 기록에는 고구려 영토 확장에 큰 역할을 한 장군으로 나와 있다. 바보가 장군으로 변신할 수 있도록 도와 준 매니저가 버티고 있었으니 바로 평강 공주였다.

평강공주는 6세기 고구려 평원왕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울보 공주였다.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많은 아이였다. 그녀가 어찌나 울어댔는지 평원왕은 울음을 그치게 할 요량으로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보내겠노라 엄포를 놓곤 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점이 하나 있다. 고구려의 영토는 굉장히 넓었다. 그런 나라에서 하찮은 바보의 이름이 왕에게까지 전해졌다면 그 바보는 예사 바보가 아니다. 바보라도 뭔가가 있는 바보인 것이다. 그냥 보통의 바보하고는 차원이 다른 바보이다.

평강 공주는 자라면서 늘 온달의 이름을 들어왔다. 그러면서 그 바보가 예사 바보가 아니라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달았을 것이다. 어쩌면 결혼적령기가 되었을 때 아버지 몰래 온달을 만났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바보에게 사랑을 느끼고 가능성을 발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평강공주가 열 여섯 살이 되자 평원왕은 그녀를 당대 최고의 가문인 고씨 집안에 시집을 보내려고 한다. 고구려의 왕위는 비교적 안정적이었지만 그렇다고 귀족 세력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공주들은 가장 유력한 귀족 가문으로 시집가 왕과 귀족 사이를 잇는 가교 역할을 떠맡았다. 평강공주 또한 이런 정략 결혼의 희생물이 되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역시 이 욕심 많고 주장 강한 울보 공주는 반항한다. 고씨 집안에 시집가 봤자 자기 인생이 어디서부터 어디일지 너무나 빤히 보이기 때문이었다. 지엄한 아버지, 게다가 국왕의 명을 거역한 그녀가 갈 수 있는 곳은? 죽음 아니면 도망뿐이었다.


여자가 먼저 프로포즈를?

평강공주의 가출은 또 한번 그녀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소매 끝으로 눈물을 훔치며 무작정 가출하는 것은 평강 공주 스타일이 아니다. 그녀는 차근차근 돈 되는 패물들을 챙긴다. 그리고 어느 날 야음을 틈타 슬그머니 궁궐을 빠져 나온다. 그리고는 온달의 집으로 찾아간다. 그런데…. 온달과 그의 노모가 보인 반응은 차가웠다. 온달은 평강공주의 가출을 두고 ‘어린 여자가 할 짓이 아니다! 필시 여우나 귀신일 것이다’ 라는 폭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물러날 평강공주가 아니었다. 평강 공주는 태어나 처음으로 자존심을 꺾고 온달의 집 사립문 앞에서 잠을 자면서 모자를 설득한다. 공주의 지위를 버리고 한 남자의 아내가 되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시작한 것이다. 평강공주는 우물쭈물하는 온달을 낚아 채 겨우겨우 결혼을 한다.


평강공주와 온달장군

평강공주는 결혼 후 궁궐에서 가지고 나온 패물을 몽땅 팔아 온달의 집을 일으켜 세운다. 온달에게는 학문과 무예를 닦도록 주선한다. 한편으로는 궁궐에서 나온 병든 말을 헐값에 사들여 자신이 직접 키웠다. 궁궐에서 선택한 말이라면 반드시 명마의 피를 타고난 만큼 그 성정을 잘 다스리게 되면 원래의 자질을 피워 낼 수 있다는 것이 공주의 생각이었다.

그 말들은 모두 명마가 되었다. 말을 고를 때도 현재의 모습이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가능성과 자질을 본 것이다.

마침내 때가 왔다. 평강공주는 평원왕이 여는 사냥대회에 온달을 가장 좋은 명마에 태워 내보낸다. 온달은 공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두각을 나타낸다. 그리고 평원왕과 당당하게 대면한다. 평원왕은 뛰어난 무사로 나타난 온달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온달이 고구려와 후주의 전쟁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우자 평원왕은 온달이 자신의 사위임을 만천하에 공표한다.


죽어서까지 그녀의 말을 듣다

왕의 사위로 용맹을 펼치던 온달은 한강변 아차산성에서 신라군의 화살을 맞고 전사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한강변을 차지하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온달은 죽어서도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던지 관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평강공주는 남편의 주검을 부둥켜안고 조용히 속삭인다. 이미 생사가 결정이 났으니 이제 돌아가 쉬라고. 그러자 수많은 병사의 힘으로도 움직이지 않던 온달의 영구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온달은 평생에 자신을 이끌어주고 성장 시켜준 아내 평강공주의 말을 죽어서까지도 신뢰하고 따랐던 것이다.

평강공주 콤플렉스란 말이 있다. 좀 못난 남자를 만나도 그를 제대로 성공시켜서 대접받고 살겠다는 야무진 꿈이 바로 평강공주 콤플렉스다. 무능한 남자들의 환상만 키워주는, 여자들을 뼈빠지게 고생시키는 것이 바로 이 평강공주 콤플렉스라지만, 그 콤플렉스의 원조격인 평강공주의 삶을 찬찬히 보면 신데렐라처럼 사는 것보다는 이렇게 사는 인생도 어쩐지 나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김정미 방송ㆍ시나리오 작가

입력시간 2003/06/26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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