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칸 브리프’ ‘의뢰인’ 등으로 낯익은 미국의 유명작가 존 그레샴이 91년 처음으로 터뜨린 베스트셀러는 ‘더 펌’ (The Firm). ‘펌’ 은 대형 법무법인을 일컫는 ‘로펌’ (Law Firm)을 지칭한다. 하지만 이 소설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 라는 엉뚱한 제목으로 둔갑했다. 당시만해도 로펌은 낯선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불과 7년. 로펌들은 내로라하는 대기업도 무너뜨리는 IMF파고에도 아랑곳않는 견실한 기업으로 자리잡았다. 오히려 ‘IMF특수’ 를 누리며 호황기를 구가하고 있다. IMF사태 이후 수임사건이 떨어졌다며 울상짓는 변호사업계 에서 로펌은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 로 통한다.

회사정리·기업인수합병, 로펌엔 ‘효자’

국내 최대 로펌인 ‘김&장 법률사무소’ 에 근무하는 박병무(38)변호사. 새벽 상담을 요구하는 고객들 탓에 졸린 눈을 부비며 사무실로 향하는 시각이 보통 오전 6~7시. 하루종일 법전과 회사서류를 들척이며 바쁘게 움직이다 그나마 주어진 식사시간 마저도 회의를 진행하며 샌드위치 한조각으로 대신하기 일쑤다.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오는 야근에는 자정을 넘기는 것이 이제 예사가 돼버렸다. “요즘은 그나마 형편이 좋은 편이지만 한참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을 때면 호텔방에 틀어박히거나 퇴근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는 게 박변호사의 말이다.

로펌 ‘IMF특수’ 의 실체는 자금에 목말라 있는 기업들에게 해외자금을 수혈하는 인수·합병(M&A). 올초부터 국내로 몰려들어 탐색전을 벌이던 외국의 ‘기업사냥꾼’ 들이 하반기들어 하나 둘씩 계약을 성사시키기 시작한 것. IMF시대의 로펌은 ‘총성없는 경제전쟁’ 의 첨병으로 거듭났다.

외환위기 전까지만해도 로펌에서 최고 대접을 받으며 ‘영입대상 1호’ 로 손꼽혔던 것은 금융전문 변호사. 우리나라 대기업의 해외투자 등 외국으로 진출하는 업무가 주된 일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해 한보사태를 시작으로 이어진 부도사태 때는 화의나 법정관리에 정통한 기업정리 전문가들이 ‘하이에나’ 라는 별명을 들으며 밤낮을 잊어야 했다. 기아 진로 해태 나산 극동건설 거평 쌍방울 등 굵직굵직한 기업들의 법정관리·화의신청이 올 상반기까지 줄을 이었다. 법무법인 세종의 양영태 변호사는 “경제가 나빠져 기업의 영업활동이 위축되면서 해외투자와 기업간 소송이 급격히 줄어들었던 반면 회사정리사건이 급증해 오히려 일감이 20~30%는 늘었다” 고 회고한다. 회사정리사건은 외환위기 이후 올상반기까지 그야말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한 셈이다.

이것도 잠시. 하반기로 접어들면서 회사정리와 관련한 신규사건은 뚝 떨어졌다. “구제를 신청할만한 대기업은 거의 대부분 걸러진데다 나머지 기업들도 최장 6개월까지 부도가 유예되는 워크아웃(기업구조조정)쪽으로 방향을 선회, 하반기들어 신규사건은 전무한 상태” 라는 것이 로펌 관계자의 설명. 이렇게 빈 자리를 비집고 들어선 것이 바로 ‘M&A’ (기업인수합병). 요즘 왠만한 로펌에서는 금융전문가나 회사정리 전문가들마저 M&A팀에 가세하지 않은 곳이 드물 정도다.

풍부한 전문인력 확보가 경쟁력 좌우

현재 M&A시장의 90% 이상을 점령하고 있는 것은 김&장을 비롯, 국내 ‘4대 로펌’ 으로 통하는 세종, 태평양, 한미합동. M&A 프로젝트가 주어지면 특허 노사 환경 조세 부동산 금융 등 거쳐야할 실사작업이 한두가지가 아니어서 풍부한 전문인력이 없다면 경쟁력을 지닐 수 없는 탓이다. 로펌이 흔히 ‘종합병원’ 에 비유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구조조정을 원하는 국내 기업이나 자본을 투자하려는 외국기업들이 경험이 풍부하고 이름있는 로펌을 선호하는 것도 이들 ‘빅4’ 의 주가를 높여주는 이유다.

국내 변호사 110여명을 비롯, 전직원이 700여명에 이르는 명실상부한 국내 최대 로펌 김&장은 설립자인 김영무 장수길 변호사가 베테랑인데다 외국고객이 많아 가장 눈에 띄는 실적을 드러냈다. 대상(구 미원)의 라이신 사업 부문을 독일의 바스프(BASF)에 양도하는 6억달러 계약을 성사시킨 것을 비롯, 볼보의 삼성중공업 중장비사업 인수, 두산그룹과 OB맥주를 인수한 인터브루의 자본참여 등을 대거 성사시켰다. 또 H&Q의 쌍용증권 주식인수나 브리티시 텔레콤(BT)의 LG텔레콤에 대한 자본참여도 김&장의 작품이다.

세종은 보워터의 한라제지 인수를 성사시킨 것을 비롯, 한솔PCS의 대규모 외자유치와 쌍용증권의 지분매각 등이 성공작으로 평가된다. 소송 업무에 강세를 보여온 태평양도 올들어 영역을 확장, 제일은행 정부 지분의 해외매각과 대한중석의 중석사업 부문을 이스라엘 ‘이스카’ 에 매각하는 등 ‘굵직한 딜’ 을 성사시켰다. 상대적으로 국내사 고객이 많은 한미합동은 한화기계의 베어링 사업부문 매각 등을 깔끔히 마무리했다.

건당 수입료 수억에서 수십억까지

M&A는 최소 수억달러 이상의 ‘공룡계약’ 인 만큼 이들 로펌은 건당 적게는 수억원에서 많게는 수십억원에 달하는 수임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현재 각 로펌들이 진행중인 프로젝트까지 포함한다면 이들의 수입규모는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하지만 이들은 프로젝트가 주어지면 보안을 유지하겠다는 서약서부터 쓴 뒤 철저히 물밑에서 작업을 하기때문에 M&A건수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현재 상태로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답변일 뿐이다.

이들 로펌들은 내년 3월에도 연수원을 수료한 변호사들을 7~10명 충원할 계획이다. 신규채용을 포기하거나 오히려 해고도 불사하는 다른 기업들이나 불황을 겪고있는 일반 변호사업계와는 대조적이다. “일감이 계속 늘어나기 때문에 새로운 인력을 충원하는 것은 필요하다” 는게 로펌 관계자의 말. 로펌의 현상황을 그대로 대변한다.

그러나 로펌 변호사들에게도 ‘위기의식’ 은 있다. 국가적 경제위기 상황이 계속되면 로펌도 곧 일감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 법무법인 태평양의 오양호 변호사는 “IMF 이후 회사정리사건과 M&A사건이 이어지면서 호황을 누려왔지만 이것은 특수한 상황에 불과하다. 경제가 회복되야 국제금융, 해외투자 등 본연의 영역을 확대할 수 있다” 고 지적한다.

하지만 호시탐탐 국내우량기업을 노리는 외국기업이 수두룩하고 워크아웃에 실패한 기업들이 내년 초께는 법정관리나 화의로 다시 돌아설 가능성이 높다는게 변호사업계의 공통된 예상. 로펌의 미래는 여전히 ‘하늘색 꿈’ 인 셈이다.

사회부·이영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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