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만들었다] "기계에서 불난다, 그만좀 돌려라"

09/24(목) 14:32

“나는 주간한국의 창간멤버다”

이말을 나는 늘 자랑스럽게 한다. 그 시절 우리는 행복했으니까. 천년가난을 극복하고 끼니 걱정 없이 ‘잘사는 세월’ 의 예감이 막연하게 우리를 감싸기 시작하던 무렵. 지성(知性)에 대한 공복증(空腹症)이 그 예감에 얹혀 기대감이 되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시기. 그 기대를 기꺼이 떠안는 새로운 문화매체 만들기의 첨병으로 참여했던 “주간한국 창간멤버” 는 자랑이 아닐 수 없다.

나의 37년 신문기자사(史)를 통해 보아도 그 시절 4년여는 빛나고 생동스러웠던 때였다. 그때는 구성원 모두가 그랬었다. 새살처럼 표피가 여리고 예민했던 감수성과 오염안된 호기심, 그리고 쩔쩔 끓던 열정에 휩싸여 호(號)마다 홈런을 쳐대던 시절. 구체적이고 확실하게 “낙양(落陽)의 지가(紙價)를 올리고” 있었던 주간신문, 그것이 주간한국이 었다.

지금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무렵의 주간한국은 그럴만하게 고품질(高品質)이었다는 점이다.

창간호를 만들때의 우리의 소박한 염원은 ‘1,2개월 안에 3만부 독자를 확보하는 것’ 이었다. 1964년 현재의 그 시절 그것은 손익분기점을 가리키는 수치이기도 했다.

그러나 신생 주간한국은 한주일을 기다릴 틈도 주지 않고 독자를 불려갔다. 당시 한국일보의 제작 캐퍼시티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났다.

우리들이 즐겨 ‘왕초’ 라는 애칭으로 부르던 장기영(張基榮)사주는 신문욕심이 큰 분으로 유명하다. 신문부수가 늘어나는 일은 그분의 더할수 없는 희열이었다. 그런 그분이 한창때의 주간한국을 찍을 때에는 기계를 붙잡고 “이 X들아! 기계에서 불난다, 고만좀 돌려라” 하고 소리를 질렀다는 일화가 있다. 일간지 찍는 틈틈이 주간한국을 돌려야 하는데 그 낡은 윤전기로 53만부를 찍는 일은 무리였던 것이다. 그쯤 되니까 그 영향력도 무서운 폭발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래도 그 무렵의 우리 모두는 죄없고 순진했다. 부원이 전원 몰려 다니며 ‘맥주 마시기 챔피온 대회’ 나 벌이고 시낭송대회로 배고픈 문화인들에게 희떠운 신명떨이를 시키는 정도였지, 그 힘을 사사롭게 쓰거나 권위로 휘두를줄은 몰랐다. 적어도 그 때의 우리가 만든 주간지는 ‘악덕 주간지’ 의 혐의는 지니고 있지 않았다. 사실 확인을 하지 않고 쓰는 일따위는 자존심 때문에도 생각해보지 않았고 냄새나는 기사같은 것을 흥정하지도 않았다. 그런 우리였지만 항간에서는 모함도 있었고 의심도 많이 받았었다는 것을 우리도 안다. 그러나 지금와서도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때의 우리는 부끄럽지 않았다’ 는 것.

그 때의 우리는 일도 그렇게 부끄럽지 않게 해댔다. 일이 많다고 불평을 하거나 어려운 일이라고 몸을 사리지 않았다. ‘신문사일’ 이란 너무도 ‘신성’ 해서 가정이 예사로 뒷전에 밀렸고 취재비는 한푼 받지 않아도 ‘취재를 못했다’ 는 불명예를 짊어지지 않기 위해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해멨다.

한국일보 구건물 그 삐걱거리는 가건축 옥상에 있던 주간한국시절의 행복했던 황금기를 나는 빛나는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송정숙·전보사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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