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리가 경제 죽인다] "중소기업이 말라죽어요"

09/30(수) 14:00

‘추래불사추(秋來不似秋)…’

지난해까지만 해도 추석연휴를 전후한 9월이 되면 그나마 중소기업들도 한시름을 덜 수 있었다. 아무리 자금난에 시달리던 기업들이라도 이맘때만 되면 추석자금 방출로 주머니가 한결 뿌듯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해는 돈이 안 돌아도 너무 안 돌고 있다.

8월 중순부터 정부가 중소기업을 겨냥해 돈을 푸는 조치를 잇따라 내놓았지만 ‘신용경색’현상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금융기관들도 9월부터 지원 자금을 특별 배정하고 대출 금리를 인하했지만 중소기업으로 흘러 들어가는 자금줄은 말라붙고 있다. 산업부문에 자원을 배분하는 금융시스템이 마비되면서 극단적 양극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말뿐인 지원, “돈이 안오는데 무슨 수로…”

오히려 대부분의 중소기업들은 빚 독촉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경기지역 기계업체인 K사. 이 회사는 경기은행의 지급보증을 받아 산업은행으로부터 7억원의 대출을 받아썼다. 그러나 경기은행이 퇴출된 뒤 산업은행으로부터 상환압력을 받고 있다. 경기은행을 넘겨받은 한미은행이 “경기은행측의 지급보증을 믿을 수 없다”고 선언한 탓이다.

이처럼 특별히 뛰어난 기술력이나 자금줄을 갖지 못한 대부분의 평범한 중소기업들은 신규 대출은 커녕 기존 대출의 만기연장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담보를 넣고 돈을 빌리려해도 담보가치를 워낙 후려치는 탓에 좀체로 돈을 얻어쓸수가 없다. 묶인 담보는 풀어주지 않고 대출금은 당장 갚으라니 곤경에 처할수 밖에 없는 형편이다.

물론 정부에서는 각종 정책을 통해 돈을 풀고 있다. 재정경제부는 8월 중순 중소기업 특별자금 6조원을 올 10월까지 앞당겨 지원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한국은행도 9월초 총액대출한도를 2조원 늘리고 금리도 현행 5%에서 3%로 낮췄다. 금융기관들도 9월부터 상업어음 할인금리 등 각종 금리를 낮추고 있다. 하나은행의 경우 중소기업에 5억원 이상의 대출을 유치하면 20만원의 상금을 지점운영비로 지원하는 등 유인책을 쓰고 있다.

그런데도 자금은 중소기업으로 향하지 않고있다. 각종 조치들이 나온 9월에도 예금은행 대출은 오히려 5,537억원이나 줄었다. 한국은행 박철 부총재보는 “통화공급을 늘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시중엔 자금이 풍부하게 있다. 문제는 중소기업에 자금이 돌아가지 않는 신용경색”이라고 말했다. 박 부총재보가 말하는 시중은 그러니까 ‘시중’이 아니다.

극단적 양극화, 대기업 ‘풍요’ 중소기업 ‘갈등’

요즘 중소기업의 자금상황은 한마디로 ‘극단적 2중 양극화’로 표현할 수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양극화, 우량중기와 일반중기의 양극화가 혼재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양극화. 지난 8월까지 현대 삼성 대우 LG SK그룹등 5대 그룹은 전체 회사채 발행액의 80%를 휩쓸었다. 또 9월중 4조원 어치의 물량을 내놓을 예정이며 10월에는 유상증자를 통해 전체 조달액(9조7,100억원)의 38%를 독식할 것으로 보인다. 은행들의 극심한 대출 기피 속에 6대이하 그룹의 회사채 발행이나 유상증자가 지지부진하고 중소기업들이 한계상황에서 자금난으로 허덕이는 것과는 극단적 대조를 이룬다.

우량중기와 일반중기의 양극화도 심각한 수준이다. 최근 당국이 중소기업 지원실적은 대출잔액기준에서 순증(純增)기준으로 바꾸면서 은행지점장들은 돈을 꾸어줄 기업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뛰고 있다.

이런 현상은 경제난으로 부도가 속출, 대출해줄 만한 기업은 갈수록 줄어드는 반면 금융당국에서는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을 늘리라고 성화가 대단하기 때문이다. 우량은행은 당국의 독려가 아니라도 돈이 쌓여 어떻게든 대출 수요처를 찾아야 할 형편이다.

지점장들은 중소기업 대출 실적으로 지점경영 평가에 반영하겠다는 본점 지침에 머리를 싸매고있다. 그렇다고 아무데나 대출해 줄 수도 없는 입장이다. 잘못 대출해줬다가 부도라도 나면 감원 대상 리스트에 오르기 십상이다. 결국 얼마 안되는 우량기업을 놓고 은행들이 치열한 유치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국민, 신한은행 등은 다른 은행이 거래하는 우량기업 명단을 본점 차원에서 파악해 일선 점포에 내려 보내기도 했다. 거래처를 뺏거나 그렇지 못하면 복수거래라도 하라는 주문이다.

신한은행은 우량중소기업에, 무역어음 할인 때는 우대금리보다도 0.5%포인트 낮은 연 10% 금리를, 상업어음 할인 때는 우대금리와 같은 연 10.5%라는 파격적 금리도 제시하고 있다. 조흥은행은 돈을 빌려주겠다는 신문광고를 내기까지 했다.

또 국민은행은 신화부채비율이 300% 이내이거나 신화자산규모가 30억이상이며 신화최근 3년간 매출액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신화최근 3년 가운데 2년 이상 흑자를 낸 기업이라는 4가지 기준을 정해놓고, 이 가운데 3가지 조건만이라도 충족하면 일단 접촉해 보라고 일선점포에 시달했다.

“돈 없고 일 없는데 망할 수밖에 없잖아”

이같은 자금사정의 ‘극단적 2중 양극화’로 한때 국내산업 역군으로 칭찬받던 일반 중소기업들은 급속하게 무너지고 있다. 이에따라 부도업체가 속출하고 있고 그나마 명맥을 이어가는 기업들도 장기 휴폐업에 돌입하고 있다.

건설중장비 부품을 만드는 경기 시흥시 시화공단내 L기계. 300여평의 공장에는 각종 공구와 만들다만 철구조물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을 뿐 망치소리 한번 들리지 않는다. 직원들도 거의 눈에 띄지않고, 4~5명 정도가 출입구 근처에 모여 앉아 잡담만 나누고 있다. 한 직원은 “20여명의 직원이 조를 나눠 한달씩 번갈아 근무하지만 워낙 일감이 없어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라고 하소연했다. L기계에서 50여㎞떨어진 Y기계공업, W기공 등은 아예 철문이 굳게 닫혀 있고, 문은 열었지만 직원들이 놀고 있는 곳을 찾기도 어렵지 않다.

실제로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가 2만3,000여개 업체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7월말 현재 공식적인 휴·폐업 업체는 772개로 나타났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두배이상 늘어난 규모. 7월 한달만도 휴업업체와 폐업업체가 각각 113개와 54개에 달했다. 기협중앙회 관계자는 “휴폐업을 신고하는 곳은 극히 일부에 불과한 데다 7월이후 가동률이 60% 아래로 떨어진 점을 감안하면 실제 휴·폐업 업체는 3,200여개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이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철환·경제부 기자


(C) COPYRIGHT 1998 THE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