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의 변신 "투사의 모습으로..."

09/24(목) 10:53

거리로 나선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 어깨띠를 두르고 불끈 쥔 주먹을 치켜올리며 ‘야당파괴 중단’ 을 외치는 그의 모습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이 총재 스스로도 “여전히 좀 쑥쓰럽다” 고 말한다. ‘점잖은’ 엘리트 코스를 거치며 정상성의 복원과 합리성을 강조해온 그의 ‘투사변신’ 은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함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총재의 이런 ‘모험’ 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일단 당내에는 그의 강경드라이브에 토를 다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만큼 야당을 둘러싼 정치환경이 척박하다는 데는 공감대가 이뤄져 있다는 얘기다. 거꾸로 이 총재가 현 국면에서 온건노선을 택했다면 호시탐탐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비주류에 의해 벌써 발목을 잡혔을 지도 모른다. 그나마 비주류가 ‘조용히’ 따라오고 있는 것은 그의 투쟁노선이 적어도 당내적 관점에서는 현실적 명분과 타당성을 담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이 총재 주변인사들은 이번 대여 투쟁에 대해 “힙겹긴 하지만 이 총재로서는 결코 손해볼 것이 없는 싸움” 이라고 말한다. 국세청 사건 등으로 인해 이 총재의 이미지에 약간의 상처가 났을 수도 있지만 ‘탄압받는 이회창’ 의 이미지 또한 여론에 각인됨으로써 ‘야권 대표주자’ 로서의 위상을 굳히는 계기가 됐다는 분석이다. 당의 한 5선의원은 “이 총재는 비로소 자생력을 가진 ‘대중 정치인’ 의 기틀을 다졌다” 며 “앞으로 여러가지 신고(辛苦)가 있겠지만 ‘야당에는 이회창’ 이라는 인식은 국민들 사이에 갈수록 확산될 것” 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당부설 사회개발 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여당과의 싸움이 격렬해지면서 10%에도 못미치던 당지지도가 수직상승해 최근에는 20%대를 돌파했다” 고 주장했다. 여당의 ‘독주’ 에 대한 견제심리에다 한동안 이완됐던 영남권 등의 지역감정이 다시 불붙은 데 따른 결과라는 것이다. 그 저변에는 이회창의 등장에 따른 야당 구심점 회복이 주요 동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게 이총재측의 해석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대여 투쟁의 ‘초보자’ 로서의 미숙함도 동시에 드러냈다. “법원의 최종 확정판결이 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한다는 원칙에 따라 적임자를 기용한 것” 이라는 그의 강변에도 불구하고, 국세청 사건 연루혐의자인 서상목 의원을 정책위의장에 임명한 것은 감정에 치우친 무리수였다는 게 당안팎의 대체적인 평가다. 서 의원이 일주일여만에 의장직을 자진 사퇴하고 검찰의 소환요구에 응한 것은 이같은 여론의 압박이 결코 가볍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는 그가 여론의 흐름에 대한 냉정한 판단의 토대위에서 한수 한수 대응수를 구사하는 정치게임의 기법을 아직은 체득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정치는, 특히 야당은 강기(剛氣)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야 말로 여권이 가장 기대하는 노림수” 라는 비주류 3선의원의 지적은 이와 관련해 음미해볼 만하다. 이 총재는 또 이기택 전총재대행에 대한 검찰의 소환발표가 나온 날 “국세청의 불법 모금자금과 당에 유입된 사실이 검찰에서 입증된다면 이에 상응하는 입장을 밝히겠다” 며 사실상 유감을 표명한 것도 “전혀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는 비판을 받았다. 여권핵심부의 동향에 대한 정보력 부재가 구설수에 오른 것이다. 3김씨처럼 지역기반이 단단하지 못한 이 총재에게는 이같은 ‘작은 실수’ 가 보다 심각한 악재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총재측은 “이 총재는 대선때와 비교할 때 많이 변했고 지금도 변하고 있다. 그의 미숙함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 이라고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이 총재는 지금 여당과의 싸움을 모양좋게 마무리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아무리 강경한 투쟁수단을 동원한다 해도 야당이 칼자루를 쥔 여당을 굴복시킬 수는 없음을 그는 잘 알고 있다. 또 여당의 ‘의원빼가기와 편파, 보복사정’ 이 야당 생존차원의 투쟁명분이 될 수 있을지언정 국민적 이슈로의 확대재생산이 쉽지 않다는 점도 투쟁의 분명한 선을 긋는 요인이다. 따라서 이 총재도 적당한 시점과 명분을 잡아 정국을 정상화시켜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서 의원을 검찰에 출두하도록 하고, 국세청 사건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면서 그는 이미 이런 의중을 내비쳤다. 다만 여당이 사정의지를 굽히지 않는 등 ‘성의’ 를 보이지 않고 있는 탓에 이 총재로서는 ‘하는 수 없이’ 강공기조를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여당의 기세로 볼때 이 총재는 이번 싸움에서 ‘손해’ 를 볼 가능성도 적지 않다. 여당과 여론의 압력에 밀리는 모양으로 국회등원을 결정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날로 거세지는 사정바람에 동요하는 의원들이 속출하는 당내 사정도 그 개연성을 높여준다.

하지만 이 총재와 주변 인사들은 설령 그렇게 된다 해도 이것이 결코 ‘이회창의 좌절’ 이 될 수는 없다는 주장한다. “정치권의 계산법으로 보면 이 총재가 진 것으로 비쳐질 수 있지만, 국민은 이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여지가 얼마든지 있다” 는 논거에서다. 이 총재는 현재의 대여 투쟁은 전쟁터의 한 전투에 지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당장의 이해득실 보다는 한시도 명분과 여론을 놓지 않는 정도정치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2,000년 16대 총선에서 최후의 승자가 되겠다는 것이다.

유성식 정치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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