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에게는 지난 3개월이 3년, 아니 30년 세월처럼 길고 무겁게 느껴졌을 것 같다. 대선패배의 아픔을 딛고 8개월여만에 정치일선으로 복귀하자 마자 ‘세풍’(稅風)’에 휘말렸다. 이후에도 소속의원들의 잇따른 탈당행렬과 사정태풍, ‘총풍’(銃風)등 굵직한 외부악재와 숱하게 마주쳐야 했다. 그야말로 산너머 산이었다. 한 측근은 “이 총재의 인생에서 이처럼 고난한 ‘형극의 길’은 없었다”며 “올 겨울은 유난히 춥게 지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 총재는 지난 3개월동안 배수진을 치고 대여투쟁의 선봉에 설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 포진해 있는 어느 한 사람도 “이 총재를 위해 내 한몸 바치겠다”며 선뜻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래서 이 총재는 대여투쟁의 총사령관이자‘가투(街鬪)의 전사(戰士)’로 1인2역을 소화해야 했다. 자신의 정치생명은 물론 당의 사활이 걸린 처절한 싸움이었다. 그 과정에서 적잖은 상처도 입었다. 하지만 “현정권을 견제할 수 있는 강력한 대항마의 대표주자”라는 나름의 ‘이미지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3개월간에 걸친 이 총재의 대여투쟁은 이제 1막을 내렸다. 지난 11월10일 청와대 총재회담을 계기로 한시적인 휴전상태에 들어간 것이다. 불씨는 언젠가 다시 피어오르겠지만, 어쨌든 외부전선은 당분간 잠잠해진 셈이다.

한나라당 체제정비, 쉽지않은 해법찾기

지금 이 총재에게 닥친 당면과제는 당체제 정비작업이다. 한나라당을 명실상부한‘이회창당’으로 탈바꿈시키는 난제인 셈이다. 어떻게 보면 이 문제는 대여투쟁보다 더 해법을 찾기 어렵다. 무엇보다 당내 계파간의 이해관계가 복잡다기하게 얽혀 있다. 엄청난 휘발성을 잉태하고 있어 자칫 잘못 다루다가는 당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될 지도 모른다. 26일 전국위원회를 앞두고 벌써부터 불길한 징조가 곳곳에서 슬슬 고개를 내밀고 있다. 이총재와 대립각을 형성하고 있는 이한동·김덕룡전부총재와 서청원전사무총장 등 비주류는 물론, 심지어 주류 내부에서조차 파열음이 새어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말많은 정치권이 이를 그냥 내버려둘 리 만무하다. 당안팎의 호사가들은 여권의 내년 상반기 정치 시나리오까지 늘어놓으면서 “이회창 총재 체제가 불안하지 않느냐”며 입방아를 찧어대고 있다. 이들이 내세우는 불안요인은 이총재 자신을 포함한 당내문제와, 권력구조개편 논의및 여권의 정계개편설과 맞물린 외생변수 등 두가지로 압축된다.

먼저 내부적 요인.“이총재는 역대 야당총재 가운데 가장 취약한 기반위에 서 있다. 원외로써 나름의 지역기반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비빌 언덕이 없는 셈이다. 본인의 자유의지 여부를 떠나 자금동원 능력도 없어 보인다. 3김정치인처럼 혹독한 야당생활을 동고동락해줄 ‘충신’도 찾을 수 없다”는 평가를 듣는다. 물론 이는 주로 국민회와의 자민련등 여당쪽에서 나오는 진단으로“정치적 뿌리가 튼실하지 못한 것이 이총재의 최대의 약점”이라는 주장이다.

당내 다양한 계파, 이 총재 운신폭 좁혀

일곱색깔 무지개처럼 다양한 프리즘을 형성하고 있는 복수계파도 이 총재의 운신을 제약하는 요인. 우선 민정계는 주류의 김윤환계와 비주류의 이한동계로 갈려있고, 민주계도 이총재계와 중도계열의 부산민주계, 김덕룡전부총재와 서청원전총장처럼 독자노선을 걷는 홀로서기파 등으로 혼재돼 있다. 여기에다 이기택전총재대행계의 구민주당 인사와, 개혁그룹의 초·재선의원들도 독자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 총재의 측근의원조차 계파문제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수도권의 한 의원은“이 총재가 어떠한 형태로든 당내의 이질적 목소리를 조화시켜야 한다”며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시간을 끌면 중구난방이 되고, 급기야 당이 풍비박산나고 만다”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그는 “이 총재가 화합분위기로 이끌려고 하는데 비주류측의 반발이 워낙 거세 효과를 볼 수 없다”며 “심지어 이한동전부총재는 탈당까지 운운하는데 어떻게 같이 갈 수 있겠느냐”고 덧붙였다.

왜곡된 의사통로도 당의 경화증을 부추기고 있다. 이 총재의 영(令)은 3선이상의 웬만한 중진의원들에겐 제대로 먹혀들지 않는다. 대신, 초·재선의원들과는 궁합이 그럭저럭 잘 맞는 편이다. 한편 초·재선의원들은 중진들의 주장을 호락호락 수용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외적인 요인은 권력구조 개편논의와, 내년 5월 국민회의 전당대회를 앞두고 가시화할 지도 모르는 정부여당의 정계개편 시도와 맞물려 있다. 먼저 권력구조개편 논의에서는 김대중 대통령(대통령제)과 김종필 총리(내각제)의 대립구도로 전개될 경우, 이 총재가 제목소리를 낼 공간이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반대로 이 총재의 선택폭이 넓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있기는 하다. 한편 설상가상으로 정계개편 분위기가 무르익을 경우 이한동전부총재와 서청원전총장 등 당내 비주류가 이 총재를 흔드는 ‘반란군’으로 부상할 개연성도 있다고 봐야 한다.

흔들리지만 “결국 이 총재에 힘 실어줄 것” 전망

하지만 이같은 불안요소에도 불구하고, 이총재체제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만만치 않다. ‘포스트 DJP’의 대표주자로 이총재를 대신할 인물이 아직 뚜렷하지 않다는 점이다. 때문에 한나라당의 규모가 아무리 축소되더라도 최하 70~80여명의 의원만으로도 명맥을 유지, 후일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총재는 16대총선의 공천권이라는 무기도 잡고 있다. 정당명부제가 도입되면 그 힘은 더욱 위력을 발휘한다. 서울의 한 의원은 이와관련,“이총재와 극도로 관계가 좋지 않은 일부 의원을 제외하곤 결국에는 이총재에게 힘을 실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나아가 “김대통령은 79명으로 정권을 잡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며 “70명이든 100명이든 ‘이회창당’으로 제대로 담금질만 한다면 기회를 엿볼 수 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결국 이총재의 정치생명은 당을 얼마나 화학적으로 융합시키면서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하느냐의 문제로 귀착된다고 볼 수 있다. 이총재가 자신의 앞길과 주변 도처에 늘려있는 지뢰밭을 어떻게 피해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김성호·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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