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 뒤틀린 YS, 상도동에 '전운' 감돌아

09/16(수) 11:56

상도동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특별한 변고없이 지내던 ‘김영삼의 상도동’ 에서 각종 이상 징후들이 발견되고 있다. 8월들어 상도동을 다녀온 사람들로부터 ‘YS가 요즘 영 심사가 불편하더라’ 는 이야기가 조금씩 전해지더니,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상도동을 방문한 시점(9월9일)을 전후해선 여권의 경제청문회 실시 방침에 대한 YS의 강한 불만표출이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퇴임 후 처음으로 YS와 민주계간 상도동 회동이 있었다.

9월10일 저녁 신상우 국회부의장과 박종웅 김무성 정형근 정의화 권철현 의원 등 부산출신 민주계 의원 6명이 상도동으로 불려갔다. ‘같이 밥이나 먹자’ 는 전갈을 받은 이들은 저녁 6시30분을 전후해 속속 상도동에 모여들었다. 생선회와 갈치, 매운탕에 포도주를 겯들인 저녁모임은 3시간 넘게 이어졌다. YS는 이 자리에서 현 여권의 사정 드라이브를 강도높게 비판했다. “강경식(전경제부총리)이와 김인호(전청와대경제수석)를 잡아 넣더니, 그것도 모자라 홍인길(전청와대총무수석)이까지 다시 감방에 보냈다. 거기다가 엄기현(문민정부 초기 실세로 YS의 경남고 후배)이 하고 최동렬(청와대비서관출신으로 YS 퇴임후 상도동 재가비서로 일함)이까지 철창에 집어넣었다. 이럴 수 있나. 내 주변 사람들은 모조리 잡아 넣겠다는 것 아니가. 세상 어느나라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울분 담긴 민감한 얘기 ‘밖으로 흘려’

YS는 민주계 출신 국민신당 의원들의 국민회의 입당에 대해서도 노골적으로 언짢해 했다. “부산지역 의원들이 국민회의로 가는데, 그 사람들 그렇게 하면 정치생명 끝난 것 아니가. 다음번에 지역구 나가봐야 떨어진건 뻔한 사실 아니가. 서석재가 국민회의 가기 전에 내한테 왔는데, 국민회의 간다는 말도, 가도 괜찮느냐고 물어본 적이 없다. 다만 국민회의하고 국민신당간에 합당 움직임이 진행중이라는 이야기만 했다. 그래놓고 밖에 나가서 내한테 허락받은 것 처럼 말하고 다니는 모양이다. 그래서 되나.”

YS는 또 경제청문회에 대해서도 불응방침을 분명히 했다. “경제청문회 한다 카는데 누구 잡으려고 하는 청문회고. 뻔한 수작 아니가. 증인출석은 물론이고, 서면질의에도 응하지 않을 생각이다.”

YS가 이처럼 민감한 이야기들을 분수처럼 쏟아낸 이유는 무엇일까. ‘갇혀 지내는’ 처지에서 토해낸 단순한 울분일까, 정치적 의도가 담긴 계산된 발언일까. 전후맥락을 짚어보면 단순한 울분토로는 아니라는 느낌이다. 무엇보다 참석자들의 면면이 그렇다. 같이 밥먹은 6명 가운데 신상우 박종웅 김무성 의원은 YS를 속속들이 아는 사람들이다. YS식 정치에 익숙한 이들은 YS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충분히 소화해낼 수 있는 관계다. 뺄건 빼고 가릴건 가려서 ‘밖으로’ 전할 수 있다. 그러나 나머지 3명(정형근 정의화 권철현)은 그렇지 못하다. 자신의 발언이 여과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라이브’ 로 전달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민감한 문제에 관해선 최측근에게도 입을 다물어 버리는 YS의 평소 스타일에 미루어, 이들 앞에서 이처럼 파장이 클 이야기들을 늘어 놓았을리 없다는 것이다.

다만, 발언의 강도와 수위에 대해선 일정하게 해석을 달리할 수 있다. 모임에 참석했던 한 의원은 “YS의 어투에 익숙하지 않을 사람들은 YS가 하는 말을 들었으면 ‘현 정권하고는 완전히 틀어졌구나’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경상도 말이란 게 워낙 그런데다, YS식 어법은 특히 그렇다. 일례로 YS는 아주 가까운 사람 이야기를 하다 ‘미친 놈’ 어쩌구 한다. 불경스런 표현이 될지 모르지만 어떤 면에선 무지막지한 면이 있다. 10일 저녁에 한 이야기들도 그랬다.” 그러나 그 역시 문제가 된 발언이 ‘전혀 그런 뜻이 아니었다’ 거나 ‘왜곡 또는 와전됐다’ 고 말하지는 않았다. 전하는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크게보아 줄기는 같다는 데 동의했다.

현 여권에 대한 강한 저항의 메시지

그렇다면 YS발언의 행간 의미는 무엇일까. 우선 부산지역 의원들의 국민회의행에 관한 비난성 ‘논평’ 과 서석재 의원에 대한 언짢은 심기표출이 눈길을 끈다. 여권이 추진하고 있는 이른바 ‘민주대연합’ 은 동교동과 상도동의 재결합이 그 중심축이다. 여권이 최근들어 상도동에 해빙의 훈풍과 양가관계 복원의 물밑 손길을 보내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YS의 발언은 이에대한 거부의사 표현에 다름 아니다. 경제청문회와 사정 드라이브에 관한 언급은 현 여권에 대한 강한 저항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YS특유의 결기와 ‘여차직하면 집단대응도 불사하겠다’ 는 일전불사의 의지마저 느껴진다.

참석자들의 인적구성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이들 6인은 국민회의는 물론 한나라당에서도 마음이 떠나있는 의원들이다. 지역정서와 개인성향상 국민회의에는 갈 수 없지만, ‘이회창의 한나라당’ 에도 굳이 머물 생각이 없는 인사들이다. 한나라당 비주류 의원들을 중심으로 단속적으로 피어오르고 있는 ‘제4교섭단체’ 추진의 핵심인자가 바로 이들이다. 이쯤되면 YS의 ‘독자세력화 모색’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특히 신부의장은 YS 퇴임이후 가장 밀접하게 교감해온 처지여서 이런저런 추정과 가설의 향연이 불가피한 형편이다.

그렇지만 YS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 외길가기의 모험을 감행하고 있다고 보기에는 여러모로 무리가 따른다. 무엇보다 현실여건이 척박하다. YS로선 부산정서를 교두보 삼아 세력결집을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좋은 일이 없겠지만, 당장 부산의원들 자체가 삼분사열돼 있는 형편이다. 전체 21명의 부산의원중 민정계 출신인 정재문 김진재 유흥수 의원은 당초부터 가는 길이 달랐고, 민주계 출신인 박관용 김정수 의원과 김형오 김도언 의원은 일찌감치 이회창체제에 복속했다. 이상희 의원은 비리연루 혐의로 제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처지이고, 병마와 싸우고 있는 최형우 의원은 반은퇴 상태에 있다. 이렇게 따귀빼고 기름빼고 나면 YS가 우군화할 수 있는 병력은 채 ‘한줌’ 이 되지 못한다.

이런 제반여건을 감안한다면, YS의 발언에는 ‘나를 더이상 밀어부치지 말라’ 는 대여경고와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는 존재확인의 메시지가 동시에 담겨있는 듯 하다.

홍희곤·정치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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