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대그룹간 빅딜 합의, 실천에는 "글쎄?"

09/16(수) 15:40

9월3일 오후 2시 서울 여의도 전경련 대회의실.

한국산업사에 또 하나의 큰 획을 긋는 중대발표가 있었다. 손병두 전경련 부회장은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발표문을 읽어나갔다. 현대 삼성 대우 LG SK 등 이른바 5대 그룹이 석유화학 항공 철도차량 발전설비 선박엔진 정유 반도체 등 7개 업종에서 인수합병 사업양수및 양도 컨소시엄 등을 통해 구조조정을 하는데 합의했다는 내용이었다.

진통에 진통을 거듭하던 5대그룹간 빅딜(대규모 사업교환)이 일단 7개 업종에 대한 사업구조조정이라는 모습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그 평가는 시작부터 엇갈렸다. 오직 산업자원부만이 긍정적 입장이었다. 애초 추진했던 만큼의 성과는 거두지 못했지만 5대 그룹을 일단 구조조정의 출발선에 세웠고 더군다나 업계 자율로 이뤄냈다는 것 자체가 성과라는 평가였다. 산업자원부는 “대기업들 사이에 이 정도 규모의 사업교환이 이뤄진 전례가 있었느냐”며 “자율적 빅딜이 어려운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최선의 대안을 선택한 셈”이라고 일단 합격점을 매겼다.

하지만 이번 사업구조조정이 우리 경제를 되살릴 수 있는 옥동자를 낳을지, 수렁으로 더욱 빠뜨릴 수 있는 기형아를 낳을지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분석 또한 만만찮다. 총론에는 합의했지만 세부 각론에서 아직 구체적으로 정해지지 않았고 실제 합의안에 대한 이행여부도 의문이라는 해석이었다.

스티브 마빈 쟈딘플레밍증권 이사는 “빅 딜은 나쁜 거래”라고 단정하고 “과잉설비를 해결하는 방법은 설비를 폐쇄하거나 유휴설비로 돌리는 것 뿐인데 이번 방침은 과잉생산시설 잉여인력 과도한 부채를 오히려 심화시킬 것”이라고 일축했다.

재경부와 금감위도 1차 구조조정안에 대해 방향은 수용할 수 있지만 각론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 또 이를 해결하기 위해 경영주체 확립과 이 경영주체에 의한 강도높은 자구계획서를 9월말까지 제출토록 요구했다. 경영주체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만든 자구계획서는 실천으로 옮겨지기 힘들다는 의구심에 따른 조치였다.

박태준 자민련 총재는 “경제회생에 재벌들이 가장 큰 책임을 져야하는데 이번 사업교환은 주식교환에 지나지 않으며 기업의 전문화를 도모한다는 당초 목적에도 부합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청와대 입장도 매한가지였다.

5대그룹의 7대업종 구조조정방안은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걸림돌에 대한 지적이 여기저기서 불거져 나왔다.

우선 경영주체확립문제가 가장 큰 골치거리다. 정부는 경영주체에 대해 “지분문제와 상관없이 구조조정을 책임지고 추진할 수 있는 주체”라고 설명했지만 이는 현실을 너무 모르고 하는 얘기다. 반도체는 현대전자와 LG반도체, 석유화학은 삼성종합화학과 현대석유화학이 경영권을 포기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시한내 책임있는 경영주체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특히 반도체의 경우 현대와 LG의 한치 양보없는 의견 대립으로 합병이 이미 물건너 갔다는 견해도 대두되고 있다. 따라서 9월말까지 새로운 경영주체가 인원 및 중복설비 정리, 증자를 포함한 재무구조개선 및 외자유치 계획 등을 만들어내기에는 시일이 빡빡한 상태다.

정부 요구대로 경영주체를 내세운다고 해도 이번 5대그룹 구조조정이 성공을 거둘지는 의문이다. 세계은행측은 벌써부터 경쟁력집중을 들먹이며 추가적인 자금지원을 하기 곤란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외세’(外勢)를 들먹이며 재정경제부 관리가 금융·세제상의 지원을 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어 재계와 정부·금융권은 벌써부터 샅바싸움을 벌일 기미다. 정부는 그동안 재계를 밀어부친 이유 때문에 각종 세제 감면안을 마련해 놓고 있지만 금감위를 포함한 금융권은 재계의 각종 금융지원 요청이 그리 달갑지 않은 눈치다. 재계가 요청한 상호지급보증 해소와 담보부족분을 신용대출로 전환해 달라는 요구는 어느 정도 수용하는 분위기지만 대출금 출자전환과 이자율 인하에는 난색이다. 시중은행은 BIS(국제결제은행) 자기자본 비율을 맞추기에 급급한 실정에서 대출금을 출자전환해 주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고용조정도 장애물이다. 구조조정 효과가 극대화되려면 통합 후 고용조정이 불가피한 상황인데 현대자동차 정리해고에서 보았듯이 노조의 강경투쟁에 따른 고용조정 한계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또 고용조정에 앞장설 주체가 명확치 않다면 강력한 고용조정이 어렵고 조정대상인원배분을 둘러싼 난맥상도 예상되고 있다.

그룹간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있는 자동차부문 구조조정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머지 업종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는가도 재계가 풀어야 할 숙제다. 자동차사업을 하고 있는 재벌들이 대부분 유화와 반도체업종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자동차 문제가 뒤틀릴 경우 이미 파열음을 내고 있는 반도체와 함께 유화업종의 구조조정을 장담하기 어렵다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자동차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업종의 구조조정을 실무적으로 추진하기에는 무리가 따를 것”이라며 “구조조정 방안을 발표하기는 했지만 실제 어느정도 진척될지는 장담하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어렵사리 이룬 5대그룹간 사업구조조정은 또 벌써부터 특혜시비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혜시비는 정치권의 발목을 잡고 있다. 대기업들이 적자 투성이인 몇몇 사업을 합쳐놓고 거액의 부채탕감 등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합병을 추진키로 한 삼성종합화학과 현대석유화학의 경우 산업은행을 비롯한 금융권에 대출금을 출자전환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 회사의 부채규모는 무려 5조8,000원이 넘는다. 항공3사도 컨소시엄을 이루는 조건으로 산업은행 출자를 요구하고 있으며 철도차량과 정유업계 역시부채탕감과 세제지원을 바라고 있다. 결국 정부와 금융권이 이들 기업에 대한 지원책을 마련할 경우, “간판과 소속만을 바꾼 재벌들이 과잉중복투자 업종을 살리기 위해 소중한 국민돈을 낭비한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재계는 채권은행들이 대출금을 출자로 전환하면 대출금만큼 외국자본을 유치해 은행빚을 갚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합병대상 사업의 부실이 심각한데다 사업성도 그리 밝지 않다는 점에서 기대만큼 외자가 들어올지도 미지수다. 또 외자유치를 위해선 정부의 단일법인 설립에 따른 확고한 지원이 전제돼야 하는데 출자전환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를 기대하기는 힘들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이밖에 중대한 경영상의 변동이 있을 때는 주주에게 매수청구권 행사여부를 묻게 돼 있는데, 만약 주가가 떨어질 경우 권리 행사가 줄을 이을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구조조정 자체가 벽에 부닥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재계와 정부는 이번 구조조정에서 해결해야 할 산적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또 그 결과는 1차구조조정은 물론 2·3차 구조조정의 실행 및 성공여부를 가늠하는 척도로 작용할 전망이다.

김기성·서울경제신문 산업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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