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간한 중견기업이라도 4년간 1,000억원의 순수익을 올리기는 쉽지 않다. 나이 서른살을 갓 넘긴 젊은이가 이런 돈을 버는 것은 더구나 상상하기 힘들다. 하지만 이런 일을 해 낸 사람이 있다. 바로 이건희(李健熙) 삼성그룹 회장의 장남 재용(在鎔)씨이다.

이재용씨는 17일부터 사흘에 걸쳐 자신이 갖고 있던 삼성그룹 계열사 제일기획 주식 29만9,375주를 모두 팔았다. 매각대금은 153억8,700만원. 이 주식은 제일기획이 올 3월 상장되기 전 사모 전환사채(CB)를 인수를 통해 갖게 된 주식이다. 이씨가 제일기획 CB매입에 쓴 돈이 20억1,600만원으로 추정되므로 133억여원을 간단히 번 것이다.

이씨가 삼성그룹 계열사의 주식을 통해 돈을 번 것은 제일기획 건만이 아니다. 계열사 주식이 상장되기 전 싼값에 주식이나 사모 CB를 사들인뒤 상장이후 높은 시세차익을 얻는 것이 이씨의 ‘재테크 비법’ 이다. 이씨는 95년말 그룹 계열사인 중앙개발 등이 보유하고 있던 에스원 주식 12만여주를 주당 1만9,000원에 사들인 뒤 지난해 2월 모두 팔아 291억원을 남겼다. 또 96년말에는 삼성엔지니어링 주식 47만주를 주당 5,000원에 사들였다가 지난해 2월 주당 5만9,000원에 팔아 256억원의 차익을 냈다.

94년 이후 주식매매 통해 1000억원대 이익

이씨는 또 지난해 3월에는 삼성전자가 발행한 사모 CB 450억원어치를 사들인뒤 이를 주식으로 전환, 약 102만6,000주를 갖고 있다. 현재 삼성전자주식이 시가가 7만원선임을 감안하면 총 270억원가량의 평가이익을 낸 것으로 증권업계는 추산하고 있다. 삼성전자 주식 외에 이씨가 갖고 있는 삼성계열사주식은 에스원 주식 10만1,139주, 삼성엔지니어링 8만4,720주 등이다. 94년 이후 이씨가 삼성그룹 계열사 주식 매매를 통해 얻은 이익은 총 1,000억원대가 된다는 계산이다.

이씨가 94년 처음 주식을 사들였던 ‘종잣돈’ 은 부친 이건희 회장이 물려준 60억8,000만원이다. 이씨가 당시 낸 세금은 16억원. 지난해 이씨가 삼성전자가 발행한 사모CB를 대량으로 사들이자 편법증여라는 비판이 거세게 일었지만 당국은 뾰족한 대책을 찾지 못했다. 그러자 참여민주사회 시민연대가 이씨를 상대로 CB의 주식전환을 금지하는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장하성(張夏成)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장은 당시 “정관규정이나 주총특별결의도 없이 사모CB발행이 이뤄졌고 전환가격 역시 시가보다 훨씬 낮게 정해졌다” 며 “이는 소액주주의 CB인수권을 침해하고 결과적으로 소액주주의 돈을 특정인에게 변칙 이전시킨 결과를 초래했다” 고 소장에서 밝혔다. 참여연대는 지난해말 결국 소송에서 승리하는 개가를 올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판결이 내려지기 하루전 이씨가 CB를 주식으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이씨는 미국 하버드대 비즈니스 스쿨에서 경영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올6월 임창욱(林昌郁) 대상그룹 명예회장의 장녀 세령(世玲·21)씨와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 이씨가 재산관리에 지속적인 관심을 쏟기는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주식매매의 절묘한 시점이나 CB를 활용한 ‘아이디어’ 는 그룹차원의 치밀한 ‘관리’ 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으리라고 보는게 타당하다.

절묘한 매매 등 그룹차원의 치밀한 ‘관리’

이씨에 대한 이건희 회장의 편법증여와 이로 인한 이씨의 재산증식은 국정감사의 단골메뉴였다. 그런데 이번에 제일기획 주식을 매입한 시점은 공교롭게도 금융감독위원회 국감이 끝난지 불과 열흘뒤 이뤄졌다. 삼성전자 사모 CB발행도 사모CB를 시가 이하로 발행하지 못하도록 재무관리규정이 강화되기 직전에 이뤄졌다. 게다가 지난해말에는 법원판결 하루전에 주식전환을 마치는 치밀함을 보였다. ‘삼성이 하면 다르다’ 는 말이 절로 나올 수 밖에 없다.

삼성그룹측은 이씨의 재산증식과정에 대해 문제가 제기될때마다 “적법한 절차를 통한 주식매매를 일방적으로 매도해서는 곤란하다” 는 반응을 보여왔다.

사실 삼성만이 이런 방법을 통해 대주주에게 재산을 몰아주는 것은 아니다. 앞서 96년 6월 ㈜농심의 이동원(辛東原) 사장과 두 아들이 120억원어치의 CB를 인수한 사실이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또 올해 주가가 크게 떨어지자 대주주들의 주식증여가 여느해보다 급증한 1,710억원에 달한데서 보듯 증여세를 줄이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그룹이 세금 ‘몇 푼’ 아끼며 회장의 아들에게 돈을 안겨주기 위해 온갖 머리를 굴리는 모습이 일반국민들에게 아름답게 비칠 수는 없다. 더구나 동원되는 방법들이 소액주주의 권리를 침해할 소지가 없지 않을때는 더더욱 바라보는 시선이 따가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재벌들의 변칙재산증여에 애용되는 전환사채(CB)는 무엇인가. CB는 말 그대로 주식으로 전환이 가능한 채권을 말한다. CB를 산 사람은 미리 정해진 전환가격이상으로 주가가 뛰면 주식으로 전환해 이득을 얻고, 주가가 뛰지 않으면 일반 채권처럼 만기때까지 갖고 있으면서 이자수익을 얻으면 된다. 발행기업으로서는 주식으로 전환된 만큼 유상증자를 실시한 효과를 볼 수 있다. 전환되지 않더라도 CB금리는 일반 회사채 금리보다 낮은게 보통이기 때문에 싼 금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3개월뒤 주식으로 전환이 가능한 A기업의 CB 1,000만원어치를 샀다고 치자. (전환가격은 7,800원, 만기는 99년 12월31일, 만기보장수익률은 13%라 가정)이 회사 주가가 3개월뒤 1만5,000원으로 뛰었을때 CB를 주식으로 전환할 경우 1,282주(1,000만원 나누기 7,800원)를 받게 된다. 이 주식을 주식시장에서 바로 팔면 약 1,923만원(1,282주 곱하기 1만5,000원)을 손에 쥘 수 있다. 1,000만원을 투자해 3개월만에 923만원의 수입을 올리는 것이다. 이재용씨가 막대한 시세차익을 얻은 것은 이같은 경로로 가능한 것이다. 주가가 떨어진다면 CB를 주식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내년 12월31일 만기가 되면 연 13%의 금리를 적용받아 약 1,140만원을 받을 수 있다.

물론 CB가 항상 엄청난 이익을 가져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주가가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 힘든데다 CB는 유통되지 않기 때문에 필요할때 현금화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해당기업의 주가를 어느정도 ‘관리’ 할 수 있고 당장 현금이 필요한 돌발사태가 일어날 일이 없는 재벌그룹의 대주주에게는 이런 위험도 훨씬 적을 수 있는게 사실이다.

김준형·경제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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