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년과 78년은 한국배구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해이다. 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여자배구가 구기종목사상 첫 메달을 획득했고 78년 로마세계남자배구선수권대회에서 전무후무한 4강진출을 이뤄냈기 때문이다.

78년 남자배구가 4강에 진입했을 때의 일이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한국이 4강에 진출하자 일본의 교도통신은 다음과 같이 타전했다. “일본배구는 이제 2류로 전락했다. 한국선수들의 백어택은 매우 인상적이다. 체코, 폴란드 등을 물린친 강만수는 눈물을 흘렸다. 이 눈물에서 불타오르는 한국의 투지를 읽을 수 있다” 또 일본의 마쓰다이라 감독은 “일본보다 키가 작은 한국이 동구 강호들을 모조리 물리친 분전은 이 대회의 꽃이며 앞으로 세계배구의 태풍의 눈이 될 것이다. 강만수 강두태 장윤창 등 겁모르는 영파워의 성장이 놀랍다” 고 부러워했다.

여자 8강탈락, 남자 일본에 완패

마쓰다이라 감독의 말처럼 이후 한국배구는 세계배구의 태풍의 눈이었다. 각종 세계대회에서 한국남녀배구는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자리잡고 지칠줄 모르는 기관차처럼 앞만 보고 달려왔다. 한국배구가 세계무대에서 ‘존재의 이유’ 를 보여준지 20여년. 그러나 아무도 믿어의심치 않았던 한국배구가 한계에 직면했다는 비관적인 평가가 속속 나오고 있다. ‘개척과 도전’ 의 역사로 점철된 배구사라는 수식어조차 창피스러울 정도다. 11월3일부터 12일까지 도쿄에서 열린 세계여자배구선수권대회에서 28년만에 8강에도 들지 못했고 13일부터 도쿄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계남자선수권에서 2년여만에 일본에 충격적인 완패를 당했다. ‘도쿄비첩’ 이라고 여길만큼 한국배구계에는 충격적인 성적이었다. 아마도 78년에 한국배구를 입이 닳도록 칭찬했던 마쓰다이라 감독이 살아있다면 “이제 한국배구는 2류로 전락했다” 고 토로했을 법하다.

한국배구의 역사를 말할때 64년 도쿄올림픽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배구가 세계배구의 한귀퉁이를 차지하기 시작할 무렵이 바로 64년부터이기때문이다. 남녀팀이 모두 올림픽본선에 진출한 최초의 대회이기도 한 도쿄에서 한국배구는 걸음마수준을 벗어나 홀로서기를 시도한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 특히 남자배구는 세계최고를 자랑하던 일본을 혼쭐내줬다. 1세트에서 10차례의 동점을 이루는 접전을 펼치며 17-15로 역전패. 2, 3세트를 내리따내 대회 최대의 파란의 주역이 될 찰나 한국은 4,5세트를 내줘 주저앉고 말았다. 한국은 전패로 최하위로 처졌고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한국배구는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도약의 발판을 만들었다는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아이러니칼하게도 한국배구는 세계무대에 명함을 내민지 34년만에 역시 도쿄에서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다. 사실 이번 세계선수권을 앞두고 진준택 남자대표팀감독이나 김형실 여자대표팀감독은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12월에 열리는 방콕아시안게임에서의 금메달이 목표였기 때문이다. 남자는 부동의 세터 신영철이 부상으로 대표팀에서 자진사퇴했고 여자는 장윤희가 부상으로 대회도중 귀국하는 등 악재가 겹친 것도 기대이하의 성적을 낸 요인중 하나다. 그러나 몰락하는 한국배구의 현주소는 다른데에서 찾아야 한다는 사람들도 많다.

열악한 환경, “새로 시작해야”

8월21일부터 23일까지 중국에서 열렸던 세계여자배구 그랑프리대회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알만한 배구인은 다 아는 일이다. 김형실 대표팀감독은 당시 컴퓨터와 비디오카메라 1대를 준비해갔다. 상대팀 전력을 분석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비디오카메라로 경기를 녹화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손이 비는 사람이 비디오카메라를 관중석 한곳에 설치하는 수 밖에 없었다. 사실상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김 감독이 소중하게 여겼던 것이 컴퓨터였다. 사비로 구입해 각종 경기기록을 담을 수있도록 프로그램까지 깔아놨다. 밤늦게 경기를 마친후 김 감독은 자신이 손수 경기도중 기록한 내용을 모두 컴퓨터에 수록하는게 제일 중요한 일과중 하나였다. 이와는 반대로 일본은 이번 세계선수권대회에 상대팀 전력분석에 온갖 열성을 다했다. 비디오카메라촬영과 컴퓨터에 다양한 경기분석자료를 수록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경기때마다 무선마이크를 가진 분석요원들이 경기장 곳곳에 위치해 수시로 감독에게 상대팀의 작전을 알려줄 정도였다. 한국남자배구가 참패한 것도 일본의 이같은 ‘현미경배구’ 에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게 현지를 다녀온 배구인들의 지적이다.

70년대 한국배구를 이끌었던 배구협회 이낙선 전회장은 구기종목가운데 세계무대를 제패할 수 있는 것은 배구뿐이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배구사랑이 남달랐던 이낙선 회장은 과감한 투자와 도가 지나칠정도의 사랑으로 배구를 세계정상권으로 이끈 주역으로 꼽힌다. 그는 퇴임직전 “지도자와 선수를 못믿어서야 어떻게 세계정상을 바라보겠는가. 배구인, 비배구인을 가릴 때가 아니다. 시멘트로 틈을 바르고 회를 칠한 후에야 벽은 완성되는 것이다” 고 일침했다.

위기에 직면한 한국배구가 옛날의 영화를 되찾기 위해서는 모든 배구인들이 한결같이 못잊어 하는 이 전 회장의 말을 되새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정연석·체육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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