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루어질수 없기에 더 짙은 ‘남자의 향기’

09/16(수) 11:25

최루영화는 비극성을 전제로 한다. 현실과 운명이 인간의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무너뜨릴 때 비극은 힘을 발한다. 60, 70년대 소위 아줌마 관객의 손수건을 적신 <미워도 다시 한번>이나 <엄마없는 하늘아래>는 모성애를 주제로 했다. 그 모성애는 90년후반 <고스트 맘마>로 되살아 났다. 아이를 두고 세상을 떠난 엄마의 안타까움. 그것을 영화는 신세대적 감각과 가치관으로 되살렸다. 사랑하는 아이와 남편을 위해 새로운 엄마와 아내를 구해주고 떠나는 여자의 영혼은 바로 가족의 복원이란 중요한 가치관을 제시하며, 그것은 가족해체의 위기감이 클수록 설득력을 지닌다.

90년대 최루영화의 또 다른 모습은 부부간의 애절한 사랑. 88년 <접시꽃 당신>의 변주곡들이다. 여기엔 어김없이 인간의 힘으로 어쩔수 없는‘운명’이란 굴레를 씌운다. 죽음은 그것을 극대화하는 전형적인 장치다. 남편이나 아내가 불치의 병으로 죽을때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보내는 자와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떠나는 자가 가지는 절망만큼 눈물을 자극하는 인간 드라마는 없다. 등장인물은 더 없이 순수한 존재다. “저런 사람들에게 저런 불행히…”라는 탄식이 절로 나와야 한다. 그래야 관객들은 영화란 생각, 영화의 완성도를 잊고 동화될수 있다.

<남자의 향기>도 그런 영화다. 더 없이 아름답고 슬픈 사랑의 이야기. 거기에 마음이 뺏기면 뻔한 과정과 결말, 유치한 감상주의조차 잊어버릴 수 있다고 말한다. 하병무의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 역시 가족 틀안에 있긴 하다. 그러나 소설처럼 복선을 깔았다. 바로 가족과 이성이란 두개의 사랑이 빚는 갈등. 영화는 그것을 가능한 안타깝고 아름답게 포장하기 위해 ‘한 남자의 순수한 희생’이란 공통분모로 처리했다.

어머니가 없는 한 소년이 있다. 어느날 그의 아버지가 고아가 된 소녀를 데려온다. 소녀를 본 순간 소년은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이성과 오누이로서 사랑의 갈등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소년은 이성으로서 사랑의 감정과 욕망을 억제하고, 고통의 굴레인 오누이란 인위적 관계를 끝까지 지키며 자신을 희생한다. 그럴수록 이성으로서 사랑은 사그러들지 않고 그만큼 커지고 강렬해진다. 이를 억제하는 답답하고 안타까운 현실이 영화가 가진 슬픔의 본질이다.

혁수(김승우)는 폭력세계로 빠져든다. 폭력을 소외된 인간들의 생존수단이 아닌 절망한 인간의 우울한 자기파괴로 보는 ‘게임의 법칙’의 장현수 감독.어색하지만 우울한 혁수의 몸짓에서 그것을 다시 확인시켜 준다. 반대로 은혜(명세빈)는 밝은 삶으로 나아간다. 혁수가 조직 폭력배의 중간 보스가 될때, 은혜는 대학생이 되고, 그녀 앞에 남자가 나타난다. 예정된 것처럼 망설임과 거부, 갈등을 겪고나면 은혜는 검사인 남자와 결혼한다.

영화는 더 큰 비극을 위해 죽음을 준비한다. 둘의 관계를 의심하는 남편의 폭력을 참다못해 은혜는 살인을 하고 혁수는 은혜 대신 죄를 뒤집어 쓰고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남자의 향기는 바로 그런 혁수에게서 나온다는 것이다. 영화는 눈물을 위해, 죽음 앞에서는 어떤 극단과 과장도 용서된다고 믿는다. 그 때문에 가장 중요한 오누이의 미묘한 심리적 갈등이 빛을 잃고, 영화가 현실성을 잃어버린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김민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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