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낌없이 썼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미련한 짓 안할 것이다”

12년만에 장편소설 ‘변경’(문학과지성사 발행) 집필을 끝낸 소설가 이문열(50)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만큼 힘든 작업이었다는 역설적 표현이다. 86년3월~90년7월 한국일보에 1, 2부를 연재하고 한참을 쉰 뒤 지난해 4월부터 올해7월까지 3부를 썼다. 원고지로 1만4,000장, 책으로 12권 분량이다. 10권이 출간됐고 25일까지 나머지 2권이 완간된다. 이씨는 지금 대미를 장식할 최종 200장 분량을 집필중이다. 경기 이천에 마련한 ‘부악문원’에서 숙식을 함께 하고 있는 문학도 9명과의 강습도 당분간 중단했다. “변경을 완성하는데 매달리느라 추안거(秋安居)에 들어간 셈이지요”

‘20세기의 마지막 대하소설’이라는 평론가 김병익씨의 말처럼 ‘변경’은 이씨 자신에게는 물론 한국문학사에 남겨질 또 하나의 의미있는 대작이다. “나는 이것을 쓰기 위해 작가가 되었다”고 공언한 것처럼 이씨는 자신의 가족사를 기본축으로 해서, 전후 혼란기였던 50년대말부터 4·19와 5·16을 거쳐 유신에 이르기까지의 한국현대사를 ‘변경’으로 형상화했다. ‘변경’은 바로 한국사회다. 사회주의 붕괴 이전의 미국, 소련이라는 ‘제국의 이상’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변경적인 상황’에서의 삶, 그것은 이데올로기에 휘둘렸던 뿌리뽑힌 자들, 떠도는 자들의 삶이다.

이씨는 세 명의 전형적 인물을 만들어, 그만의 활달한 입심과 남성적 문체로 그들이 살아간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그린다. 월북한 아버지를 둔 명훈, 영희, 인철 세 남매. 소매치기, 미군부대 하우스보이, 뒷골목 건달, 정치깡패 노릇을 거치며 가진 자들의 집단에 편입되기를 갈망하는 명훈은 한국적 천민자본주의의 모습 그 자체다. 매춘과 졸부와의 위장결혼으로 몸뚱어리를 밑천처럼 굴리며 살아가다 도시빈민의 삶에서 자기정체성을 획득하게 되는 영희는 기층민중의 초상이다. 그리고 그 양쪽 어디에도 편입되기를 거부하고 “두 계급의 모습을 지켜보겠다”며 문학의 길을 택하는 인철은 주변적 중간계급의식의 표상이다. 인철은 바로 작가 이씨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변경을 다시 고쳐쓰면서, 한국문학에 고집스레 남아 있는 대하소설이란 양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대하는 진지하고 심각한 이야기방식이지만 세계문학에서는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고 말한 이씨는 일본작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를 예로 들기도 했다. “하루키의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는 이거 뭐 일식과 양식을 섞어놓은 비빔밥처럼 느껴졌는데, 최근 ‘렉싱턴의 유령’ 같은 작품을 읽어보니 그것이 바로 세계에 통할 수 있는 이야기방식인 것같은 느낌도 들었다”는 것이다.

이씨의 이 말에는 그래도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그가 해외에서 각종 출판관련 행사나 인터뷰 등을 하면서 겪은 경험이 담겨있다. 지난달초 프랑스에 갔을 때의 일이다. ‘시인’등 그의 작품을 번역출판하고 있는 프랑스의 악트쉬드 출판사가 이씨 등 몇몇 외국작가들의 현지 인터뷰 일정을 마련했다. 이씨는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있는 미국작가 폴 오스터와 짝을 이뤄 인터뷰를 했다. 폴 오스터는 미국 출신이지만 프랑스에서 살기도 해 현지에서 잘 알려져있는 소설가. 그런데 그와 꼭 같이 인터뷰를 하고 나서도 기사는 항상 폴 오스터만 크게 다뤄지고 자신은 한구석에 처박혀 자존심이 상했다는 것이다. “그는 프랑스에서 60만부를 판 작가입니다. 내 작품은 3만부 정도지요. 그러니 상대가 되겠습니까. 이제 한국이라는 좁은 울타리 안에서만 만족할 것이 아니라 진짜 세계를 상대로 해야겠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지요”

이씨는 그래서 다음 작품은 ‘맨날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방법이 아니라, 세계시장에서 먹힐 수 있도록 그들의 입맛에 맞게 먼저 쓴 다음 한국에서 번역출판하는 형식이 될 것이라고도 말했다. ‘변경’이후의, 80년대를 정리하는 작품 집필은 그 다음 욕심이다. 당장 그는 논란 많았던 소설 ‘선택’의 드라마화 작업도 구상하고 있다.

하종오·문화과학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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