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에 볼만한 비디오] 안방에서 즐기는 한국영화 걸작선

09/30(수) 11:40

우리 고유의 명절인 추석이나 설에는 그나마 우리 영화를 볼 기회가 많아진다. 여름과 겨울방학, 연말연시의 큰 대목은 헐리웃 대형 액션물이 도배를 하다시피하는 현실이라 추석극장 개봉에 맞추기 위해 날밤을 샜다는 우리영화의 제작 뒷이야기를 들으면, “아유 이것도 몇년 안 가 전설이 되는게 아닐까 몰라”싶어진다. TV에서도 용케 옛날 우리영화를 찾아내어 방영하는 때가 바로 추석이나 설 명절이다.

비디오 가게에는 “어머니랑 함께 볼만한 옛날 우리영화, 특히 사극같은거 없냐”고 물으시는 중년 어른들이 부쩍 많아진다. 그런 분들께 권해드릴 좋은 우리영화들을 찾아본다.

95년, 흥진미디어라는 회사에서 ‘한국영화 걸작선’으로‘남과 북’‘맨발의 청춘’‘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빨간 마후라’를 출시한 바 있다. 네 작품 외에도‘검사와 여선생’‘마부’‘오발탄’‘미워도 다시 한번’ 등을 연속적으로 낼 계획이라고 했는데, 그만 위의 네 작품의 판매량이 시원치않아서 제작사가 망했다는 후문이 돌았다. 우리 영화를 연구하거나 즐겨 보는 이들로부터 “다 출시하고나 망하지”라는 한탄을 들었을만큼 아쉽고 아까운 기획물이다. 그만큼 우리 영화, 더구나 옛날 흑백영화 보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김기덕 감독의‘남과 북’하면 박춘석 작곡의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하는 노래를 절로 흥얼거리게 된다.‘남북 이산 가족 찾기’주제곡으로도 쓰였던 이 노래는 영화 ‘남과 북’의 주제는 물론 분단된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의 염원을 가장 잘 담아낸 감상적인 노래다. 한운사 원작의‘남과 북’의 줄거리 역시 노래 가사만큼이나 애절하다. 전쟁때문에 헤어진 여인(엄앵란)을 찾아 휴전선을 넘어 귀순한 북한 인민군 소좌(신영균). 그러나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그를 체포한 남한 부대의 중대장은(최무룡)은 그토록 못잊어하던 여인의 남편이며, 그들의 7살된 아들은 소좌의 아들, 그리고 여인은 현재 남편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

남과 북으로 갈린 우리 민족의 비극이 빚어낸 이 가슴 아픈 사연은 91년 선우완 감독의‘피와 불’(스타맥스)로 현대적인 조명을 받게된다. 북한 인민 배우 홍영희 부모의 실제 삶을 바탕으로 했다는‘피와 불’역시 남북으로 갈린 조국때문에 사랑마저 남북으로 갈려야했던 세 남녀의 비극적인 운명을 쫓는다. 그리운 그 시절 스타 대신 박근형, 전무송, 이혜영이 주연을 했다. 금강산 관광이 가시화되고 있는 시점이라 더더욱 감회가 깊은 영화 두 편이다.

김기덕 감독의 또 다른 대표작 ‘맨발의 청춘’은 영화가 아니면 불가능한 세계로 우리를 데려간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몸뚱이가 인생 밑천의 전부인 깡패(신성일)와 고급 승용차와 모피 코트를 애용하는 고관 대작의 아름다운 대학생 딸 (엄앵란)의 신분을 초월한 사랑. 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라 할 이 청춘물은 64년 당시 반항적 이미지의 대명사격이었던 가수겸 배우 트위스트 김의 노래와 연기로도 잊을 수 없는 영화다. 죽어서도 묻힐 곳 없는 신세, 더구나 맨발로 저 세상으로 가야하는 신성일을 위해 자신의 신을 벗어주며 외치던 트위스트 김의 마지막 절규는 이 걸작 청춘 영화의 백미다.

신상옥감독의 61년작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중학생의 필수 감상 소설인 주요섭의 단편을 영화화했다. 옥희라는 깜찍한 소녀의 나레이션과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으로 시작되는 도입부는 아이 시점으로 본 어른들의 은근한 사랑이라는 주제를 탁월하게 드러낸다. 최근의 우리 영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잊을 수 없는 타이틀 소개다. 과부 어머니(최은희)와 외롭게 살고 있는 옥희네 사랑방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친구라는 화가 아저씨(김진규)가 하숙을 하게 된다. 손 한 번 잡아보기는 커녕, 마주 보고 변변하게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한채 헤어지는 어머니와 아저씨의 애틋한 사랑.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진행되고 파국을 맞는 요즘 세상이기에 더더욱 가슴에 남는 진짜 사랑 영화.

신상옥 감독의 작품으로는 ‘꿈’‘궁녀’‘성춘향’‘폭군연산’‘삼일천하 김옥균’등, 전성기의 사극들이 많이 출시되어 있으므로 연로하신 분들께 권해드리면 좋겠다.

박경리 원작의 대하소설‘토지’는 KBS-TV가 시리즈물로 제작하여 큰 화제를 불러 일으킨 바 있다. 문예물을 많이 영화화한 것으로 유명한 김수용감독은 이 방대한 소설의 전반부 극히 일부분을‘토지’(백록 비디오)에 담았다. 하동의 만석꾼 집안을 지키는 아름다운 과부 마님(김지미)과 그의 아들 최지수(이순재), 그리고 별당 아씨(서희). 아씨를 탐내는 최지수의 이복 동생과 이 집안의 재산을 탐내는 조준구 내외의 이야기가 얽혀들며 근세사의 한 장이 도도하게 흐른다.

‘토지’처럼 서사적인 영화를 상업적인 계산이 모든 것에 우선해야 하는 현재의 우리 영화계로서는 다시 만들기 어렵지 않을까? 이 영화 출연 당시의 김지미와 같은 이미지의 배우도 찾기 어려울테고, 장소 헌팅도 어려울테고. 그래서 더더욱 이 시절 영화들이 귀하게 느껴진다.

낙엽지는 계절에 생각나는 우리 영화하면‘만추’(금성)를 빼놓을 수 없다. 제목 자체에서 계절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데 내용마저 애절하고 슬프다. 남편을 살해하여 복역 중인 혜림(김혜자)은 특별 휴가를 얻어 기차에 몸을 싣는다. 이 밤 기차에서 만난, 경찰에 쫓기는 금고털이범 민기(정동환)와의 짧은 사랑과 기인 이별. 이만희 감독이 문정숙, 신성일 주연으로 만들었던 66년도 작품을 김수용 감독이 83년에 다시 만들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영화 출연을 한 김혜자는 이 작품으로 마닐라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낙엽이 수북히 쌓인 청주의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 강릉과 속초의 철지난 바닷가와 등대, 부산 서면의 공원 풍경 등과 그 속을 걸어가는 두 연인의 쓸쓸한 모습. 영화로마나 가을 여행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다.

옥선희 비디오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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