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 비디오와 함께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10/28(수) 15:10

복잡한 세상사 떨쳐버리고 훌쩍 떠나고 싶은 계절, 너도나도 단풍관광길에 나서는 가을이다. 하지만 유명관광지는 언제가봐도 ‘사람 반 차 반’ 이다. 아예 사람과 차에 시달릴 생각 접고 안방에 앉아 느긋한 마음으로 비디오와 함께 가을여행을 떠나보자.

◆줄리안 포

손잡이가 떨어져나간 낡은 트렁크를 옆구리에 끼고 터벅터벅 걷고 있는 사나이. 서른살이 되도록 바다를 보지 못했다는데 생각이 미쳐 무작정 길을 떠났다. 도중에 차가 서버리자 미련없이 자동차 키를 내던지고 시골길을 걷는다. 걷다가 문득 생각이 떠오르면 29달러 주고 산 작은 녹음기에 대고 혼자 중얼거린다, 일기를 쓰듯이. 이 사나이의 이름은 줄리안 포(크리스찬 슬레이터). 발길 닿는대로 걷다가 바다가 가까운 작은 마을에 머물기로 한다. 낯선 이방인의 등장은 64㎞이내에 다른 마을이 없는 이 조용한 동네에서는 커다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시장, 보안관, 신부님 모두 모여 논란이 분분하다. 마약 딜러일까, 테러리스트일거야, 폭탄을 만드나. 온 마을 사람들이 그를 졸졸 따라다니며 감시한다. 마침내 궁금증을 참다못한 사람들이 그에게 대들듯이 묻는다. 누구를 죽이려고 이 마을에 온거냐고. 답이 궁한 사내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나를 죽이려 한다” 고 내뱉는다.

알란 와드 감독의 ‘줄리안 포 The Tears of Julian Po’(우일)는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는 도시인의 무작정 여행을 설득력있게 묘사한다. 숫자와 씨름을 해야하는 회계원이라는 직업, 서른살 되도록 바다를 보지 못하고 살아온 나날. 트렁크 하나면 족한 일상의 짐. 작은 녹음기에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생각들을 털어놓는 사색의 여정. 포의 가을 여행은 그보다 더 단조롭고 무료하게 살고있던 작은 마을 사람들의 지나친 관심으로 깨어지지만 그동안 그가 얻은 것, 베푼 것을 어찌 다 설명할 수 있을까.

크로아티아 출신의 작가 브라니미르 스케파노비치의 소설 ‘골루야씨의 죽음’ 을 영화로 옮긴 이 작품은 이 계절에 가장 잘 어울리는 영화다. 그저 보고있는 것만으로도 여행이 시작되는, 그리고 나의 일상을 되돌아 보게되는 블랙 유머의 감동적인 소품.

◆까밀라

남자만 떠날 수 있는게 아니다. 혼자는 무섭고 위험하다면 함께 떠나보자. 인도 출신의 캐나다 여류감독 디파 메타는 ‘까밀라 Camila’(시네마트)에서 80대 할머니(제시카 탠디)와 20대 여성(브리짓 폰다)의 여정을 따라간다. 그들이 함께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것은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에 얽힌 추억과 사랑때문이다. 음악과 가정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했던 할머니와 자신의 음악인생을 여가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는 애인때문에 고민하는 젊은 여성의 여행은 주변남성들의 반성과 이해로 해피엔딩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이란의 세계적인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올리브 나무 사이로’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는 이란 북부의 농촌을 배경으로 한 로드 무비로 ‘지그재그 길 3부작’ 으로 불린다. 도저히 영화가 될 것같지 않은 소재, 우리가 흔히 ‘영화같다’ 고 표현하는 극적인 재미나 놀라운 반전없이 아주 작고 평범한 이야기로 인생의 모든 것을 깨닫게해주는 현자의 가르침.

가장 최근에 비디오로 출시된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And Life Goes On’(우일)는 자동차로 달리는 여정 그 자체가 영화의 기승전결, 인생의 희노애락임을 드러내는 놀라운 영화다. 영화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편견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이 3부작을 보며 먼 나라 이란으로, 혹은 영화 만드는 세계로, 단순명료한 진리의 세계로 떠나보시길.

◆데드 맨

미국 감독이라고 다 가벼운 오락물에만 재능을 쏟아붓는건 아니다. 짐 자무쉬가 ‘데드맨 DeadMan’(우일)을 발표할 때 나이가 42세. 젊은 나이는 아니지만 이만한 사색의 깊이, 표현력을 갖춘 점을 생각해보면 결코 많은 나이가 아니다. 무성영화를 보는 것같은 흑백 영상으로 미국 서부를 가로지르는 청년 블레이크(조니 뎁)의 여정을 따라간다. 신비한 인디언 노바디와 함께 물질 문명너머 정신의 세계로, 이승의 삶이 아닌 저승의 고요로 향하는 블레이크의 여행. 우리는 이런 여행을 생전에 한번이나마 흉내낼 수 있을까. 영화로만 가능한, 그리고 짐 자무쉬만이 안내해줄 수 있는 여행이다.

◆마르코 폴로

‘데드 맨’ 에서 풍기는 죽음의 내음이 너무 무겁게 느껴진다면 역사상의 인물과 상상의 여행을 떠나보도록 하자. 미국, 영국, 이스라엘의 합작품인 ‘마르코 폴로 Marco Polo; The Missing Chapter’(시네마트)는 베니스의 감옥에서 마르코 폴로가 감방 동료에게 털어놓음으로써 기록으로 남게된 ‘동방견문록’ 에서 누락된 마지막 장을 재현한 초현실주의적인 분위기의 영화다. 마르코 폴로가 몽고의 쿠빌라이 칸과 보낸 20여년의 세월 끝에 고국으로 돌아오던 시기가 십자군의 퇴각시점과 비슷하다는 데 착안하여 마르코 폴로의 마지막 여정을 상상한 것이다. 너무나 사랑했던 아내와의 이별과 재회, 그를 이단으로 몰려는 기독교인과의 충돌, 사막에서의 고행 등이 분방한 상상력에 힘입어 놀랍게 그려진다. 감독은 라피 부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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