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장군 순국 400주년] '앙숙' 이순신과 원균

10/15(목) 14:30

“원균은 이순신을 시기, 모함하여 하옥시킨 뒤 삼도수군통제사(해군 참모총장) 직을 빼앗았으며 그 뒤 왜적에게 대패하여 3도(경상·전라·충청도) 수군을 거의 전멸시키고 자신도 육지로 도망하다 왜적에게 살해됐다.”

‘구국의 영웅’ 이순신 장군의 인생역정에서 그의 발목을 잡아 고난의 길을 걷게 하는 간악한 인물로 등장하는 것이 원균이다. 과연 그럴까?

원균 장군은 그토록 간악하고 무능한 인물이었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임진왜란이 끝난 뒤 이순신, 권율과 함께 3명뿐인 1등공신에 오를 수 있었을까?

여기서 이순신 장군이 관직을 모두 박탈당하고 평민 신분으로 그 유명한 백의종군을 하게 되는 과정을 잠시 살펴보자.

△1597년 2월 26일 이순신 장군 삼도수군통제사 직에서 파직. 서울로 압송. △투옥 28일만인 이해 4월 1일 간신히 사형을 면하고 도원수(조선군 총사령관)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 백의종군(白衣從軍)은 사면이 아니다. 곤장 100대나 유배 3년 형에 준하는 처벌이다. 해군 대장을 이등병으로 강등시키는 것과 같다.

당시 이순신을 잡아가둔 죄명은 무엇인가. 국왕 선조가 명시한 이순신의 죄명 4가지는 이렇다. “조정을 속였으니 임금을 업수이 여긴 죄요, 적을 쫓아 치지 않았으니 나라를 등진 죄요, 거기에다 남의 공을 빼앗고 또 남을 모함한 죄와 한없이 방자하고 거리낌 없는 죄가 있다.”

이러한 죄라면 당시의 어떠한 법률을 적용해도 사형을 면치 못한다.

첫째 “조정을 속였으니…”는 당시 도체찰사(都體察使·비상시 왕명을 받아 왕을 대신하던 총사령관직) 이원익의 주도로 부산의 일본군 주둔지(倭營·왜영)를 완전히 불태운 사건을 이순신이 자신이 주도한 것으로 허위보고한 것을 말한다. 실록 등의 기록에 따르면 이순신은 적정을 정탐하기 위해 부산에 부하들을 파견했는데 이들이 왜영이 불타는 것을 보고는 자신들이 불을 질렀다고 거짓으로 보고했다. 이순신은 이를 그대로 믿고 다시 조정에 보고해 표창까지 받았는데 나중에 사실이 판명된 것이다.

둘째 “적을 쫓아 치지 않았으니…”는 일본군 선봉장군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바다에서 잡아오라는 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역시 일본군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조선 재침략(정유재란)을 앞두고 조선 조정에 정보를 흘린다. 가토군이 1597년 1월 4일 대마도에 도착해 순풍이 불면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바다에서 공격하면 이길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고니시로서는 이 작전이 먹히면 평소 원수같던 가토가 없어져서 좋고 먹히지 않으면 조선 침략의 최대 걸림돌인 이순신이 항명죄로 파직될 것이므로 좋고 하는 속셈이었다. 조정은 이 정보를 받아들여 출전을 명한다. 먼바다에서 적 주력군의 재침을 미리 막겠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적 첩자의 말을 믿을 수 없고 많은 군선을 이끌고 출전하면 작전이 노출되고 군선을 적게 출전시키면 적에게 협공당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출전을 거부한다. 바로 이 부분이 선조가 항명으로 규정, 이순신을 투옥시킨 뒤 삼도수군통제사를 원균으로 교체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이에 대해 예비역 해군 준장 강영오씨는 ‘이순신의 출전거부는 항명이다’라는 논문에서 이순신과 조정의 전략적 사고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이순신 제독이 제4차 부산 출전때까지 보인 해상통제 전략을 현대적 시각으로 보면 주로 출항통제와 협수로통제를 적용했다고 볼 수 있다. 출항(出港)통제란 기지에 대기중인 적 함대를 공격하거나 봉쇄하는 것이며 협수로(狹水路)통제란 적 함대가 병목점을 통과하는 가장 취약한 상황을 이용하여 공격하는 것이다. 반면에 가토군의 도해(渡海)차단은 험난한 대양에서 기다렸다가 싸우는 광역(廣域)통제이기 때문에 이순신으로서는 수행하기 어려운 함대작전이었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 “한없이 방자하고 거리낌이 없는 죄”는 임시정부를 이끌던 세자 광해군이 전황 협의차 전주로 오라고 여러차례 불렀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가지 않은 부분이다.

원균과 이순신의 불화의 원인은 그 앞부분 “남의 공을 가로챈 죄와 남을 모함한 죄”에서 드러난다. 선조실록 36년 4월 21일조 기록. “임진년에 거제도 앞바다에서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경상우수사) 원균이 함께 왜적을 크게 쳐부수고 왜선 50여척을 포획한 성과를 거둔 뒤 원균이 조정에 보고하려 하자 이순신이 속이기를 ‘공(원균)과 협력하여 일을 한다면 왜놈들을 섬멸하고 말고 할 것도 못되는데 이런 소소한 승전을 뭘 조정에 보고할 필요가 있겠소. 내가 다른 도(전라좌수영)에서 급작스럽게 구원하러 왔기에 무기를 갖추지 못했으니 왜적에게서 노획한 것을 써야겠소’하자 원균이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는 이순신은 비밀리에 사람을 시켜 노획한 병기와 왜적의 배에 실려 있던 금병풍 금부채 등의 물건을 가져가 보고하도록 하여 과시하였으므로 전공이 모두 그 자신에게 돌아가게 됐다. 이때 조정은 한창 다급한 때였으므로 보고를 받고 기뻐하여 이순신을 통제사로 제수하고 (군 선배인) 원균을 이순신의 지휘를 받게 하니 원균이 이 때문에 크게 화가 나 서로 협조하지 않았다”

또 선조수정실록 25년 6월조도 당시 조정의 골칫거리였던 두 해군 사령관의 불화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처음에 원균이 이순신에게 구원병을 청하여 적을 물리치고 연명으로 장계를 올리려 하였다. 이에 순신이 말하기를 ‘천천히 합시다’하고는 밤에 스스로 연유를 갖춰 장계를 올리면서 원균이 군사를 잃어 의지할 데가 없었으며 적을 공격함에 있어 공로가 없다고 진술하였으므로 원균이 듣고 대단히 유감스럽게 여겼다. 이로부터 각각 장계를 올려 공을 아뢰었는데 두 사람의 틈이 생긴 것이 이때부터 시작됐다.”

특히 불화를 심화시킨 것은 이순신이 ‘원균이 열두살짜리 아들을 멋대로 군공(軍功)에 올려 조정을 속였다’고 보고한 사건이다. 실록에 따르면 당시 병조판서 이덕형이 원균과 이순신을 대질시켜 확인한 결과 원균의 아들은 18세로 실제로 공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한성대 강병식 교수(한국사)는 “이순신의 하옥과 국문 과정에서 원균의 모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고 단언한다. “(유성룡의) ‘징비록’, ‘선조수정실록’ 등의 편찬자의 편견이 원균에 대한 사실을 왜곡시켰으며 그 결과 병자호란 이후 북벌정책 추진과정에서 상무(尙武)정신, 일제강점기의 민족정신, 그리고 5·16 이후 군인정신의 표상으로 이순신 장군이 부각되면서 사료비판없이 쓰여진 논저와 사실을 외면한 역사소설 등이 오늘날의 통설과 같은 역사왜곡과 세인들의 왜곡된 평가를 더욱 심화시켰다.”

이순신과 원균이 앙숙이었다는 사실은 당시 세상이 다 아는 일이었다. 현재 원균 장군에 관한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누구 얼마나 잘못인지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지금까지 이순신 장군 연구에서 그의 위대함을 부각시키느라 본의 아니게 원균이라는 훌륭한 장군을 내버려왔음은 분명하다. 실록 곳곳에는 원균 장군의 공적을 기록한 부분이 많은데도 말이다.

원균과의 관계에서 나타난 이순신 장군의 잘못을 모두 인정한다 해도 그는 여전히 탁월한 장군이다. 군인으로서 그 정도로 전공을 다투고 자기 부하들의 공훈을 적극 상신했다면 충분히 이해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이순신 살리기를 위한 원균 죽이기나 원균 복권을 위한 이순신 폄하는 둘 다 마땅치 않다.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밝혀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순신은 그 모든 사소한 약점까지를 포함해도 ‘영원한 영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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