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 "나의 결론은 내각제"

10/21(수) 15:02

김종필 국무총리가 내각제를 부화(孵化)시키기 위한 행보를 슬슬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때와 장소’ 를 가리는 편이라, 여전히 공식 정부행사에서는 내각제 언급을 자제하고 있지만 대학특강 등 기회만 생겼다 하면 어김없이 내각제를 알리고 각인시키기 위해 목청을 높이고 있다. 바야흐로 내각제를 본격적으로 이슈화 할 날이 그리 멀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징후들이다.

김 총리는 처음엔 선문답(禪問答) 같은 말로, 원론적인 수준에서 내각제를 언급했다. 그러나 언급횟수가 늘어나면서 표현도 점점 직설적으로 변하고 민감한 정치현안들도 건드리는 등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김 총리가 전하고자 하는 일관된 메시지는 전직대통령들의 결말과 정치자금 문제, 끊임 없이 계속되는 여야정쟁, 지역감정 문제 등은 여야 가릴것 없이 모두가 원죄를 안고 있으며 이를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자 귀결점은 내각제 달성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강한 어조로 내각제 거부 움직임에 쐐기

사실 김 총리는 신정부 출범 이후 지금까지 줄곧 내각제에 관한 언급을 극도로 자제해왔다. 경제회생에 모든 힘을 쏟아부어야할 때에 내각제 문제로 괜한 소모전을 벌여서는 안된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여기엔 처음 6개월간 총리서리의 신분이었다는 점과 공동정부의 한 축으로서 김대중 대통령과 힘겨루기를 하는 듯한 인상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저간의 사정도 있었다.

이 사이 공동여당인 국민회의 주변에서 내각제를 거부하려는 움직임들이 심심찮게 흘러나왔다. 아직까지는 주로 외곽을 때리는 식이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고려대 최장집, 동국대 황태연 교수 등의 ‘내각제 회의론’ 이었다. 이들은 김대중 대통령의 자문정책기획위원들이기도 했다.

사태가 이쯤되자 김 총리도 더이상은 침묵만 하고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그는 마침내 지난 9월 28일 이같은 여권내 반(反)내각제 기류에 쐐기를 박으려는 듯한 일성을 날렸다.

김 총리는 이날 명지대로부터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는 자리에서 “인격화된 절대권력의 카리스마 정치가 아니라 법과 제도에 의한 사회민주정치를 해야하며 이는 궁극적으로 내각책임제를 해야만 가능하다” 며 내각제 불씨를 끄집어 냈다. 누가 먼저 질문을 한 것도 아니었고 장소도 다수 대중이 모인 대학 구내였다는 점에서 관심이 쏠릴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민주주의는 절대권력을 쥔 절대자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국민의 대표성을 갖는 국회가 그 중심이 돼야한다” 며 거침없이 내각제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시종 강한 어조였고 분명 무언가 작심을 한 듯한 표정이었다.

김 총리는 이어 ‘곡학아세(曲學阿世·잘못된 학문으로 세상에 아첨하는 것)’ 란 말로 내각제 회의론자들을 점잖게 꾸짖었다. 그는 “곡학아세에서 나오는 권력주변의 왜곡된 주장, 권력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과욕, 관념에 빠져있는 생각들, 이런 것을 경계해야한다” 고 지적했다. 최 교수와 황 교수를 겨냥했음직한 발언이었다.

“불행한 정치사 내각제로 종지부 찍어야”

김 총리는 또 “정부수립 이후 대통령 일곱분 모두가 좋지 못한 종말을 맞았는데 이런 불행한 대통령사에 종지부를 찍어야한다” 고 말하는 등 대통령제의운명을 경고하는듯한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결론은 내각제’ 임을 주지시키기 위한 김 총리 특유의 법어(法語)식 훈계는 계속 이어졌다. 그는 7일 출입기자들과의 오찬에서 ‘증오와 협량(狹量·좁은 소견)’ 을 버릴것을 강조했다. 이 말은 작금의 정치현실에서 여야 모두를 대상으로 한 것으로, 정치권에 적지않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며칠후 그는 이번에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영화 타이타닉을 화제로 올리며 재미있는 비유를 했다. 그는 “커다란 재앙이 눈앞에 다가오는데도 파티나 즐기며 찰나에 휩쓸리는 타이타닉 현상을 경계해야한다” 며 “거대한 정당도 힘 좋은줄만 알고 그런 분위기에만 휩쓸리게되면 어려운 시절로 다시 돌아갈수도 있다” 고 말했다. 이 역시 해석여하에 따라서는 국민회의나 한나라당 모두를 겨냥한 말일 수도 있다.

이에앞서 김 총리는 지난달 세종로 청사 집무실에 ‘즐탁동기’ 라는 친필휘호를 내걸었다. 대선이 있던 97년 새해를 앞두고 화두처럼 던졌던 신년휘호로,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려고 애쓰는 것(즐)과 어미닭이 밖에서 쪼아주는 것(탁)이 서로 동시에 맞아떨어져야 한다는 뜻의 중국 고사다. 여기엔 내각제를 반드시 이루어야한다는 김 총리의 강한 의지가 함축돼있다.

즉 내각제를 할 수 밖에 없는 사회분위기가 조성되고 많은 국민들이 이를 염원할때 누군가가 정치적인 결단으로 이끌어줘야한다는, 김 대통령과 정부, 정치권, 국민 모두를 향한 김 총리의 메시지가 담긴 것으로 해석된다.

내각제 개헌 공론화 위한 다양한 포석

김 총리의 내각제 관련 발언은 16일 부산 동의대 특강에서 더욱 강도가 높아졌다. 김 총리는 특히 이날 특강에서 “새정부 들어 지역감정의 골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며 현정부가 가장 아프게 생각하고 있는 지역감정 문제를 거론했다.

비록 “그런 안타까운 얘기가 들린다” 는 간접화법을 쓰긴 했지만 김 총리의 이같은 언급은 앞으로의 정국변화추이속에서 내년 상반기쯤에는 내각제개헌을 본격적으로 공론화 시키기 위한 다양한 포석의 하나로 풀이된다.

김 총리는 이날 망국적 지역감정의 만병통치약으로 내각제를 제시하면서 여야 모두를 겨냥한 여러가지 민감한 문제들을 건드렸다. 그는 “정권교체도 쉽고, 정권이 바뀔때마다 전임 최고권력자를 감옥에 보내고 청문회에 내세우는 일도 없고, 정권유지를 위해 북풍공작을 꾸미거나 국가기관에게 정치자금을 모금하도록 하는 일도 없고, 동서가 다투며 인사편중이니 하는 소리도 없으려면 내각제로 바꾸는 길 밖에 없다” 고 강조했다.

김 총리가 이처럼 내각제를 부쩍 자주 거론하면서 수위를 높여가는 것은 어차피 예정된 수순이었다. 김 총리는 스스로 구상중인 일정에 따라 내년초께부터 내각제를 본격 공론화시키면서 중반 이후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건 모종의 승부수를 던질수도 있을 것이란 게 측근들의 지배적인 시각이다.

홍윤오·정치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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