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을 잊으셨나이까" 떫은 JP

10/21(수) 15:03

최근 공동여당인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관계가 왠지 심상찮다. ‘찰떡궁합’을 강조하며 공동정권 수립이후 공조체제를 과시하던 양당간에 곳곳에서 이상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김대중대통령과 김종필총리간의 틈새가 조금씩 벌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DJP의 대선 단일화 합의문에 명기된‘내각제’를 사이에 두고 벌여온 양당간의 줄다리기가 서서히 수면 위로 부상하면서 항간에는 “본격적인 권력다툼의 서막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냐”라는 의문마저 제기되고 있다.

김대통령은 10월12일 청와대 국무회의에서 “내각은 크게 반성하고 노력하라”고 전 각료의 군기를 단단히 잡았다. 새정부출범 8개월이 지나도록 가시적 변화가 없다는 국민여론을 감안, 해당 장관들에 대한 강한 질책성 메시지였다.

또 김대통령은“국민세금을 쓰는 정부가 성과를 보이지 못하는데 어떻게 국민에게만 참아달라고 할 수 있느냐”면서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사업부진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미비 ▲실업대책의 비효율성 등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대통령 질책에 자민련 ‘떨떠름한 표정’

김대통령은 부처의 각종 규제철폐와 관련, “총리도 규제의 절반 이상을 철폐한다고 했다”라며 국무조정실이 속한 총리실의 적극적 역할을 주문했다.

김대통령의 내각 질타에 대해 국민회의는 바짝 고개숙이고 있지만, 자민련은 대체로 수긍하는 입장 속에서 한편으론 고까운 표정을 감추지 않고 있다. 김대통령이 거론한 분야가 자민련 몫으로 안배된 경제관련 부서가 많았던 데다 김총리에게도 ‘실무형’ 총리로서의 역할을 우회적으로 주문했기 때문이다.

이에대해 김총리는 뚜렷한 태도변화를 보이지 않은 채 여전히 ‘정치형’ 총리로서의 행보를 거듭하고 있다. 지난달 28일 명지대 특강과 7일 기자간담회에서도 김총리는“한사람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시대는 지났다”면서 내각제 도입을 강력 주장한데 이어, 김대통령의 내각 질책 이후인 16일 부산 동의대 특강에서 “지역감정의 해소를 위해 내각제가 필요하다”면서 “내각제를 마지막 사명으로 알고 모든 노력을 쏟겠다”고 새삼 각오를 다졌다.

2인자 철학을 체득한 JP의 평소 스타일을 감안한다면 조금 눈여겨 볼 대목이다. 예전의 JP라면 대통령 지시가 떨어지자 마자 질타받은 국무위원들을 독려하거나 관계자를 불러 훈수를 두는 등의‘숙제’해결에 앞장 섰을텐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정치행보를 가속화했다. 15일에는 양당의 한화갑 구천서총무와 총무진 15명을 불러 오찬을 함께 했으며, 자민련의 신임 지구당위원장들과는 만찬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김총리는 “5·16 혁명당시의 심정으로 내각제를 이루겠다”고 더욱 결연한 의지를 나타냈다.

게다가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에 대한 여권의 파상공격이 계속되던 시점에서 김총리는 오히려 “개인의 가슴을 후벼파는 행동은 삼가하라”고 자민련 지도부에 이총재 공세의 수위조절을 지시했다는 후문이다. 내각제 실현을 위해서는 이총재의 국민회의 견제역할도 필요하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이다. 결국 국민회의-한나라당이 첨예하게 맞선 상태에서 자민련은 슬쩍 한 발을 뺐다.

미묘한 입장차, 사사건건 ‘다른 목소리’

양당간 제1약속인 내각제에 대해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이 국정에만 몰두하는 김대통령과 점점 내각제의 발언수위를 높여가는 김총리. 공동여당의 두 지배 주주사이의 미묘한 입장 차이를 바라보는 국민회의와 자민련 양당간에도 당연히 여기저기서 잡음이 튀어 나오고 있다.

잠복해있던 양당간 갈등은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인 최장집 고려대교수와 황태연 한양대교수의 반(反)내각제를 골자로 한 발언에서 노골적으로 표출됐다. 자민련은 즉각 망국적인 발언이라며 득달같이 달려들었고, 국민회의는 지도부가 사과를 천명했지만 내심‘할 말 잘했다’는 분위기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후 양당은 건건이 부딪히는 일이 잦아졌다. 사정정국이 한참이던 때에 자민련 김용환 수석부총재는 조기 종결을 주장하다 정부와 국민회의측의 일침으로 꼬리를 내렸고, 금강산 관광사업에 대해서는 자민련이 주무기인 안보논리를 앞세워 정부측의 무계획성을 공박했다.

사정이 이쯤되자 최근에는 정부 정책과 현안을 놓고도 양당이 전혀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국민회의가 추진하는 공정거래위원회와 감사원의 계좌추적권에 대해 자민련은‘절대불가’를 주장하고 나섰다. 재벌그룹의 내부거래를 차단하기 위해 공정거래위 등의 계좌 추적권 부여가 긴요하다는 국민회의측 주장에 맞서 자민련은 국민의 사생활 보호를 내세워 반대하고 있다. 이에 전윤철공정거래위원장이 자민련을 설득키위해 마포당사를 방문, 박태준총재 등 지도부를 만났지만 아무 소득이 없었다.

또 분리돼있는 기획예산위원회와 예산청의 통합을 시도하려는 국민회의측과 통합반대를 외치는 자민련의 입장도 판이하다. 국민회의는 두 기구의 업무 중복에 따르는 비효율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자민련은 정부기구의 자체 평가가 끝나는 내년 2월께 논의하자고 맞서고 있다. 이와함께 인사위원회 설치를 추진하려는 국민회의측 움직임에 대해서도 자민련은 떨떠름한 반응이다.

“지금은 아니라는 뜻이지, 안한다고 했나”

국민회의는 일련의 이런 일들이 국정의 효율화 및 현 정권의 개혁 뒷받침을 위해 적극 추진되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자민련은 그 저의를 의심하고 있다.

자민련의 한 당직자는 “거론되는 공정거래위 기획예산위 등이 모두 대통령직속기구이므로 결국 대통령의 권한을 확대하는 일”이라며 “양당 합의문에 따르면 99년까지 내각제를 마무리하기로 돼 있는 데 무리하게 대통령 권한을 확대하려는 것은 결국 다른 속셈이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즉 내각제 약속을 지키기 싫었던 속내가 이제 드러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대해 국민회의측은 원칙론을 고수하고 있다. “누가 (내각제를) 안한다고 했느냐. 다만 지금은 경제위기 극복만이 최우선 과제이므로 내각제에 신경쓸 겨를이 없다”는 당초 입장을 반복하고 있다.

그렇다고 양당간의 파워게임이 전면전에 도달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내각제공론화가 본격 시작되는 내년 초·중반이 지나야 DJP간의 ‘최후의 담판’이 성사될 수 있다. 바로 그 결전장에서 좀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양당은 경계와 대립, 혹은 협력을 거듭해가며 신경전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공조와 대립이 교차되는 시점에서 23일부터 시작되는 국정감사는 양당간 힘겨루기의 제1라운드일 수도 있다. 국민회의 소속 장관에 대한 자민련 의원들의 태도와, 자민련 소속 장관에 대한 국민회의 의원들의 움직임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염영남·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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