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총회 참관기] '신뢰의 한국경제' 아직은 먼길

10/21(수) 14:51

“한국은 훌륭하게 위기를 극복하고 있다.”

지난 10월6일 미국 워싱턴의 IMF(국제통화기금) 연차총회 개막식 연설에서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세계경제의 위기를 걱정하며 해결책을 찾자고 역설하는 그 자리에서 한국은 가장 대표적인 금융위기국가로 지목됐고 뜻하지않게 칭찬까지 들었다.

문득 3년전 같은 장소의 IMF총회장에서 클린턴 대통령의 개막연설을 들었을 때가 떠올랐다. 95년이면 나라전체가 자신감으로 가득했고 외국여행 한번 못하면 팔불출 소리를 듣던 시절. 설레임속에 처음 구경하는 IMF 총회장의 분위기를 만끽했다. 총회 연설의 주제는 모두 우리와 별로 관계가 없는 것들이었고 그래서 느긋한 자세로 흘려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바로 IMF시대고 서있는 곳은 IMF의 총회장. 단 3년만에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고 우리나라는 ‘위기를 잘 극복하고있다’ 는 속이 들여다 보이는 찬사에 ‘안도’ 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지난 10월6일부터 8일까지 열린 153차 IMF·IBRD(세계은행) 연차총회는 우리나라에 무척 중요한 기회였다. 총회에 앞서 이틀 미리 도착한 이규성 재정경제부장관은 시간을 분단위로 쪼개가며 미셸 캉드쉬 IMF총재를 비롯 국제금융계 고위인사들을 만났고 각국 재무부장관에게 협조를 당부하느라 바빴다. 때맞춰 워싱턴으로 모여든 수많은 세계금융계의 거목들을 상대로 “한국경제가 당신들 생각보다 훨씬 좋아지고 있다. 안심하고 투자하라” 고 열변을 토하는 ‘코리아포럼’ (투자설명회)은 이번 총회기간중 정부가 가장 공들인 행사였다.

외환위기주범 “핫머니를 규제하자”

공식적인 IMF총회는 6일부터 사흘동안 열렸지만 실제론 9월29일 장 미셀 세베리노 세계은행부총재가 ‘동아시아 경제회생의 길’ 이란 보고서를 내고 기자회견을 가지면서 시작됐다. 이어 30일엔 IMF가 세계경제전망(WEO)보고서를 내놓았고 10월 1일 캉드쉬 IMF총재와 제임스 올펜손 세계은행총재가 총회의 의미를 설명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본격적인 논의는 3일 서방선진7개국(G7) 재무장관 회담에서 시작됐다. 이 회의는 5일 15개 개발도상국 재무장관을 더 불러들인 G22 재무장관회의로 이어졌다. 형식상 IMF총회와 무관했지만 이 회의는 IMF에서 논의하기 껄끄러운, 그러나 반드시 다뤄야할 주제를 꺼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각국의 외환위기를 초래한 주범으로 지목된 투기성 단기자본, 즉 핫머니를 규제하자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국경을 넘나들며 금융질서를 교란시킨 핫머니를 제어하려는 사상 최초의 범세계적 시도인 셈. 금융시장에서 투기를 일삼아온 헤지펀드와 투기적 기관투자가들의 투자내역을 낱낱이 당국에 신고토록 하고 금융거래에 대한 규제와 감독을 대폭 강화하기로 했다. 이날 밤늦게 재경부 당국자들로부터 회의결과를 전해들으면서 “물은 이미 엎질러졌는데 뒤늦게 바가지를 바꾸자고 법썩을 떠는구나” 하는 회한이 밀려왔다.

3년전에 이미 경험한 일이지만 이번 IMF총회에서 ‘총회’ 라는 이름에 걸맞게 참석자들이 열띤 토론을 벌이는 모습은 아예 볼 수 없었다. IMF 총회장이 전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는 것은 IMF와 세계은행 총재, 그리고 미국대통령의 개막연설때 뿐이었다. 불과 2시간여의 개막연설이 끝나면 우리나라를 포함해 각국 대표들은 고작 10여분정도의 연설기회를 가졌다. 사람들은 자기나라 대표가 연설할때 체면치레로 자리를 지켜주다가 연설이 끝나면 썰물처럼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동원된 청중으로 채워진 시골 학교운동장의 선거유세와 하나도 다를 바 없는 모습이 올해도 10분단위로 반복되면서 사흘이 흘렀다.

사실 IMF총회는 개막 2∼3일전에 열리는 잠정위원회와 개발위원회라는 두 기구에서 모든 논의를 끝낸다. 올해는 이 두 회의보다 미국주도로 열린 G22가 훨씬 주목을 받은게 과거와 다른 점이었다.

새로운 국제금융질서 구축 주장에 공감

이번 총회의 주제는 아시아에서 촉발돼 러시아로 번지고 이젠 미국의 앞마당이라는 브라질 등 남미까지 집어삼키고 있는 전세계적 금융위기로 요약할 수 있다. 참석한 모든 국가들이 세계경제위기의 심각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위기에 맞서기 위해 모두가 협력해야 한다는 원칙은 확인했다. 지난 50여년간 IMF와 세계은행으로 상징돼온 국제경제질서가 21세기를 코앞에 둔 지금에 와서 아무런 기능도 못한다는 현실인식아래 새로운 국제금융질서를 구축하자는 주장이 광범위하게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러나 총회기간중 각국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하는지’ 에 대해선 아무런 합의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미국의 리더십이 예전같지 않고 유럽은 자기일처럼 나서지 않으려하고 일본은 제코가 석자인 처지다. 모두가 “지금 체제론 안된다.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 고 생각했지만 과연 누가 총대를 메고 변화를 주도할 것인가에서 생각이 달라지는 양상이었다.

IMF차원에서 관심이 이처럼 새로운 세계금융질서에 집중돼있는 동안 우리 대표단은 온통 “한국은 IMF의 우등생” 이라고 외치며 외화 유치에 온신경을 집중했다. 정부 사람들은 각국 정책당국자는 물론 무디스, S&P 등 세계적인 신용평가기관, JP모건 등 투자기관 관계자들을 쉴새없이 만나는 공식적인 일정을 소화하느라 파김치가 됐다. 매일 10여건이상의 면담일정을 짜놓은 은행장들도 바쁘기는 마찬가지였다. 불과 2∼3년전까지만 해도 최소 대여섯명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유람하듯 IMF총회를 찾았던 은행장들이지만 이번엔 얼굴 표정에서조차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신복영 서울은행장은 수행원 한명없이 혈혈단신으로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였다.

코리아 포럼에 국제금융계 큰 관심

10월7일 오전7시30분부터 2시간여동안 워싱턴 시내의 중급규모 한 호텔에서 열린 코리아포럼은 이번 총회기간중 가장 큰 의미를 지닌 행사였다. 이날 참석자들의 면면은 국제금융계에서 코리아포럼이 차지하는 무게가 결코 가볍지않음을 보여줬다. 우선 미국 정부의 정책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알려진 프레드 버그스텐 국제경제연구소장. 그는 “대체로 위기발생후 2∼3년이 지나야 경제가 살아나기 시작하는데 한국은 예외적으로 곧 회복이 시작될 것” 이라고 우리 정부에 힘을 실어줬다.

IMF에서는 스탠리 피셔 부총재가 나섰다. IMF는 한국에 이미 180억달러를 빌려준 입장이어서 한국이 재기하지 못하면 존립근거마저 잃어버릴 처지다. 부총재가 특정 국가의 투자설명회에 참석, 희망섞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장면은 바로 한국과 IMF가 한배를 탄 공동운명체임을 증명하는듯 했다. 피셔 부총재는 “한국은 그동안 개혁을 추진하면서 다른 신흥국가들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고 평가했다.

그러나 공식적인 반응이 이처럼 따뜻했던데 비해 정작 돈줄을 쥔 민간투자자들의 마음은 여전히 차가웠다. 여전히 한국이 IMF체제를 벗어날 수 있을지 의심했고 금융과 기업부문의 개혁이 순조로울 지 우려했다. 코리아포럼에서 참석자들이 우리 정부 당국자들에게 던진 질문은 “한국기업의 실제 채무는 얼마나되느냐” “한국의 부실채권이 100조원뿐인가” 등. 금리와 환율이 안정되고 외환보유고가 늘었다고 해서 안심해서는 안된다는, 위기의 근본원인은 아직 치유되지 않았다는 의문으로 이해됐다. 갈길이 멀다는 느낌이었다.

일주일가량 총회기간중 182개 IMF회원국은 사상 초유의 세계적 경제위기를 걱정하며 대안을 찾는데 열중했다. 세계경제위기의 한 가운데 서있는 우리는 그들을 상대로 “한국을 믿어주세요” 라고 목청을 높일 뿐이었다.

손동영· 서울경제신문 정경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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