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갑한 검찰, 판문점 총격요청사건 "잘해야 본전"

10/14(수) 11:37

‘판문점 총격요청 사건’ 이 언론에 처음으로 공개된 지난 1일 오전. 검찰의 한 간부는 수사기밀이 유출된데 대한 불편한 심기를 감춘채 내내 여유있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뻔히 안다. 바로 ‘윗선’ 이 아니겠느냐. 기소할 때 보자” 별명이 ‘지퍼’ 로 통할 정도로 입이 무겁기로 소문난 그가 “큰 그림으로 보아 대체로 사실인 것같다” 는 ‘자신있는 확인’ 을 해준 것은 이례적이었다.

그러나 추석연휴를 거치면서부터 검찰의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피의자들이 진술을 번복해 사실상 수사가 진척되고 있지 않다” “한나라당의 고문조작시비로 수사가 방해를 받고있다” 검찰 곳곳에서 불만이 터져나왔다. 검찰의 한 고위관계자는 “안기부가 왜 자꾸 수사내용을 흘리는지 모르겠다” 며 급기야 안기부를 향한 ‘직격탄’ 을 쏘았다. “안기부가 너무 앞서간 발표를 한게 아니냐” 던 당초 우려가 검찰수사가 진행될수록 발목을 죄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고문조작설 제기, 새로운 국면으로 번져

검찰이 안기부로부터 이 사건을 송치받은 것은 9월 25일. ‘3인방’ 으로 불리는 오정은(46·전 청와대 행정관) 한성기(39·전 포스데이터 고문) 장석중(48·대호차이나 대표)씨의 구속영장 혐의내용은 “북한측 인사들과 회합했다” 는 지극히 단순한 내용이었지만 사정은 사뭇 달랐다. 안기부가 영장과는 별도로 검찰에 넘겨준 막대한 분량의 의견서에는 3인방이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비선조직이며 지난해 대선직전 중국 베이징에서 북측 인사들과 만나 김대중 대통령을 낙선시키기 위해 휴전선 부근에서 총격을 요청했다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내용이 들어있었던 것. 이 총재 동생인 회성(53·에너지경제연구원 고문)씨와 진로그룹 장진호 회장이 3인방의 배후에서 자금지원은 물론 총격요청사건의 보고까지 받았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분단국가의 집권여당이 정치적 성취를 위해 적과 내통해 군사적 도발을 유도했다는 점에서 오익제 편지사건 등 ‘구북풍사건’ 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파장이 예상되는 내용이었다. 말이 의견서지 실제로 3인방의 일치하는 진술조서를 근거로 작성한 것인 만큼 검찰이 당초 자신감을 보일만도 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측이 고문조작설을 제기하면서부터 국면은 엉뚱한 방향으로 번져갔다. 법원은 추석연휴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측 신청을 받아들여 한·장씨에 대한 신체검증과 감정을 실시했다. 게다가 이들이 법정에서 속옷까지 들추며 몸의 상처를 보여주는 장면이 방송에 보도되면서 고문조작설은 더이상 ‘설’ 이 아닌 ‘또 다른 쟁점’ 으로 부각됐다. 대검 고위관계자는 “안기부에서 고문이 이뤄졌다 할지라도 검찰은 고문없이도 자백을 받을 방법이 있다” 고 말해 검찰이 안기부 수사와는 별도로 완전히 새로운 수사를 진행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이는 법원이 ‘고문자백’ 임을 인정할 경우 안기부에서 확보한 3인방 진술이 완전히 증거능력을 잃게될 뿐아니라 수사의 정당성도 큰 상처를 입게되는 부담감의 반증이기도 했다.

앞서 나가는 안기부에 곤혹스런 검찰

9일 열린 오·장씨에 대한 구속적부심은 판문점 총격요청 사건이 공식적으로는 처음으로 공개되는 자리였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철통같은 보안을 유지하며 진행되던 검찰수사의 진행 정도를 우회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는 자리였기 때문. 이날 오씨와 장씨는 “안기부 수사관들의 고문에 의해 허위자백을 했을 뿐” 이라며 혐의사실을 전면 부인, 검찰 수사가 순조롭지 않음을 내비쳤다. 검찰은 고문조작과 접견거부 등에 대한 한나라당 공동변호인단의 집중 공세에도 곤혹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이번 수사에서 검찰을 무엇보다도 곤혹스럽게 하고 있는 것은 다소 무책임(?)한 안기부의 충격적 발표내용을 입증해야 하는 ‘공’ 이 검찰로 넘어왔다는 점. “안기부에서 넘겨받은 자료를 놓고 한씨 등 3인을 상대로 신문 공방을 벌이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있다. 안기부가 흘린 내용들 중에는 실제 수사상황보다 지나치게 앞서나간 것들이 많다. 게다가 안기부가 여섯달 이상 수사한 내용을 검찰은 한달만에 마무리지어야 하는게 아닌가” 안기부로부터 사건을 송치받은지 보름이 다돼갈 즈음 검찰 고위간부가 답답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여론이 주목하고 있는 ‘이회창-이회성-3인방’ 의 연결고리를 밝혀내지 못한채 3인방의 단순한 과잉충성으로 결론이 내려질 경우 검찰이 모든 비난을 떠안는게 당연하지 않느냐” 는 것이다. 더구나 안기부는 수사내용을 검찰에 송치하는 것으로 임무가 끝나지만 검찰은 공소유지에 신경을 써야하는 만큼 책임의 정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검찰은 지난 8일 진로그룹 장진호 회장을 소환하면서부터 비로소 수사에 가시적인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검찰은 참고인 자격이라는 장 회장을 상대로 이틀간 조사를 벌이면서 총격요청계획을 알았는지, 7,000만원을 한씨에게 건네준 경위가 무엇인지, 이회성씨와의 연결고리가 있는지 등을 집중추궁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틀뒤인 10일 법원이 “피의자들에 대한 심문결과와 수사기록 등을 종합해볼 때 계속 구속해야 할 필요성이 인정된다” 는 애매한 판단으로 구속적부심을 기각한것도 검찰의 수사행보에 힘을 실어줬다. 수사팀의 한 검사는 “가뜩이나 어려운 수사에 법원이 찬물을 끼얹지 않아 천만다행” 이라며 안도했다.

검찰, 확실한 배후입증자료 확보한 듯

검찰은 수사를 가로막던 암초가 일단 제거된 것으로 보고 이번주부터 배후인물로 지목되고 있는 관계자들을 차례로 소환하는 등 본격수사에 나설 채비다. 검찰주변에서는 3인방의 진술이나 감청자료가 아니더라도 총격요청사건의 배후를 입증할 수 있는 또다른 물증이 안기부로부터 전해졌다는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수사하다보면 피의자가 혐의사실을 부인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번 사건 역시 지금까지 검찰이 파헤친 대형의혹사건처럼 정도를 걷겠다” 고 말해 이같은 관측을 뒷받침했다. 하지만 법원이 고문에 대한 신체감정 결과를 어떻게 내리느냐에 따라 검찰은 또 한차례의 커다란 홍역을 치를 수도 있는 상황이다.

과연 검찰이 사면초가의 난관을 극복하고 보란듯한 결과를 내놓을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3인방의 단순한 불장난에 불과했다는 용두사미격 결론에 이를 것인지 이번주가 최대 고비가 될 전망이다.

이영태·사회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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