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 '관포지교'와 '토사구팽'을 읽는다

10/29(목) 11:28

궁형(宮刑). 극심한 고통보다 더한 모욕감. 남자로서 최대의 수치다. 거세하지만 목숨만은 부지시켜주니, 그것만이라도 고마운 일인가.

사마천(司馬遷)이 정쟁에 휘말려 졸지에 ‘거세’당한 때는 대장부로서 웅지를 한껏 펼치던 47세. 그러나 55세 되던 기원전 91년, 필설로 못 다할 절치부심 끝에 세계 최초의 기전(紀傳)역사서를 탄생시켰다.

고전‘사기(史記)’의 내력은 그토록 처절하다. 그러나 열매는 웅혼하다. 현인과 영웅호걸의 이야기가 시공을 초월한다. 후세인들은 역사를 꿰뚫는 지혜, 그리고 처세의 비방을 거기서 얻는다. 그것은 시절이 힘들수록 새롭게 다가온다.‘사기’는 그러므로 한자문화권의 집단무의식이다.

‘새로운사람들’이 새로 펴낸‘인물로 읽는 사기’는 원문 그대로가 아니다. 명인편(처세학), 제왕편(리더술), 장군편(전략과 전술론)등 모두 3권으로 편역, 현대적 어감으로 되살려 냈다. 본뜻을 쉽게, 그러나 변형없이 전달하는 것이 ‘새로운 사람들 판(version) 사기’ 최대의 강점이다.

학교에서, 사회에서 어디선가 한 번은 들었을 법한 이야기들. 삶의 가식과 치장을 발겨낸, 인간사의 본질이란 저 정도 아닐까.

폭군의 녹봉을 받느니 차라리 고사리 캐먹고 살겠다(백이·숙제), 진정한 우정 관포지교(管鮑之交)(포숙아), 화(禍)는 곧 복(福)이고 주는 것이 받는 것이다(관중), 글이나 말이나 다 공허한 것(노자), 친구가 적이 되면 더 무섭다(한비자), 새는 나뭇가지를 골라서 앉는다(공자)…. 이상 제 1권 ‘수레를 높이려면 문지방부터 높여라’에 수록된 고사가 50편.

2권은 ‘힘으로 제압하면 변방을 얻고 독을 행하면 천하를 얻는다’편. 주지육림(하나라 걸왕)과 경국지색(은나라 주왕)에 빠져 나라 망친 이야기, 참새가 어찌 홍곡(鴻鵠)의 큰 뜻을 알까(초나라 진승), 상장군을 죽이고 상장군에 추대되다(초나라 항우), 사람 부리는 기술로 천하를 얻다(한나라 유방), 돼지치기 출신을 승상에 기용하다(한나라 무제), 바른 말도 자주하면 독침이 된다(한나라 무제)….

3권은‘목숨을 걸고 싸우는 자만이 위기를 기회로 바꾼다’편. 미녀의 목을 베 군령을 세우다(손자), 장군이 입으로 사졸의 등창을 빨다(오기), 굴욕을 참고 건달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가다(한신), 토끼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 먹는다(한신), 적을 교만하게 만든 후 허점을 노려 공격한다(목특)…. 뜻을 품은 자라면 구구절절이 바로 자신을 향한 조언으로 다가오리라.

‘사기’는 원래 본기(本紀)12편, 서(書)8편, 표(表)10편, 세가(世家) 30편, 열전(列傳)70편등 5부 130편에 이르는 대작이다. 본디 이름도 ‘사기’가 아니라, ‘태사공서(太史公書)’였다. 사마천이 오른 최고 관직인 태령(太令)이 반영된 제목이다.

‘새로운 사람들’ 편집진은 “기존의 사기 번역본들이 역사 중심이었던 데 반해, 우리는 왕이나 장군등 인물들에 초점을 맞췄다”며 “어려운 한자말도 순한글 표현으로 고쳤다“고 밝혔다. 엮은이 소설가 엄광용(44)씨는 “에피소드 중심으로 재서술한 것은, 그 쪽이 원본의 고갱이를 오늘의 독자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번 구어체 사기는 잡다한 미디어홍수 속에서 감각일변도로 치닫는 요즘 젊은이들을 위한 선물로 유용하게 쓰일 것으로 보인다. 논술시험 대비책으로도 그만이겠다.

장병욱·문화과학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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