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위기의 유창혁, 돌파구를 찾아라

10/29(목) 11:37

결실의 가을인가 조락의 가을인가. ‘고개숙인 남자’ 유창혁이 기나긴 슬럼프를 박차고 나와 뒤늦게 가을걷이에 나섰다.

큰승부에 강한 큰바둑이라던 유창혁이 올해엔 유난히 부실한 성적으로 힘없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해마다 세계대회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왔고 국내전에선 이창호와 박빙의 승부를 펼쳐 세간의 이목을 끌었던 그가 올해엔 가을이 다가도록 변변한 성적표 하나를 못받아 슬럼프를 넘어 하향기가 아니냐는 의혹을 사던 중이었다.

그도 올해 33세로 한창 절정기를 맞은 나이. 그러나 한편으로는 뭔가 이뤄놓지못할 경우 ‘어저버’ 조락기로 빠져들 수도 있는 나이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그도 유난히 위기감을 느끼는 요즘이다. 그도 그럴것이 이창호를 필두로 한국바둑계의 순위다툼에서 그는 조훈현에 이어 항상 3위를 유지했다고 하겠으나 최근엔 4위라고 해도 이상할 것 없고 5위라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성적표만 받아든 상태다.

상반기 6개월은 조훈현만이 이창호의 상대로 낙점되었다. 6개 기전에서 이창호와 조훈현은 지리한 영역싸움을 펼쳤으나 역시 조훈현의 역부족. 그러자 가을 들어 도전자로 나선 이는 최명훈이었다. 2개 기전에서 이창호와 자웅을 겨루었으나 이미 테크론배는 0:3으로 패퇴했고 천원전에서도 1:2로 뒤진 상태. 따라서 올해 들어 아무도 이창호를 극복한 기사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이창호가 초강세를 유지하자 유창혁의 존재를 더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무대는 배달왕전. 유창혁은 올들어 처음으로 국내 도전기에 나선다. 유창혁은 90년대 들어 꾸준히 하나 이상의 국내 타이틀을 보유했던 인물. 어쩌다 그 마저도 앗길라치면 곧장 또다른 하나를 획득하여 ‘빅3’ 의 일각에 언제나 간단간단하게 머물렀던 생명력이 있다.

팬들의 기대처럼 유창혁이 이창호를 잡아주리라 보기엔 이창호는 너무나 막강하다. 이미 동양증권배 후지쓰배에서 우승컵을 안았고 LG배 삼성화재배에서도 우승을 향해 맹진 하고 있는 이창호는 시간이 갈수록 상대할 자를 찾기가 힘들 정도로 드세지고 있다. 예의 유력한 장기인 형세판단력에다 최근엔 유창혁에 버금가는 공격력, 그리고 우주류를 방불케하는 세력바둑까지 구사하며 전술 또한 다양해졌다고 소문이 자자하다.

이창호가 강하다는 소리가 자꾸 나올수록 유창혁은 힘이 솟는다. 유창혁은 조훈현처럼 지속적인 성적을 내지는 못하지만 체력이나 심적 강화가 이뤄진 상태에서는 누구라도 꺾을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진 사람. 일찌기 93년에 누구도 예상하지 않았던 후지쓰배 세계대회 우승을 거둔 적도 있고 96년엔 응씨배까지 예상을 뒤엎고 가져왔다. 따라서 지금처럼 조용히 그의 존재를 잊어가는 팬들에게 소리없이 또 한번의 강펀치를 구사할 준비를 하고있는지 모른다.

결의는 이미 충만되어있다. 더 이상 말리다간 이창호는 커녕, 최명훈이나 이성재 등 한시라도 정상의 끄트머리를 노리는 후학들에게도 추월당할 지 모른다는 위기감도 있다. 위기와 찬스는 어차피 한순간의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승부사 유창혁은 잘 안다. 그리고 한번 가속을 받으면 그 역시 끝닿는 곳이 어딘지 모를만큼 질주하는 스타일이다. 따라서 11월이 열리자마자 개시될 배달왕전은 올 하반기 국내전의 최고 빅카드가 될 소지가 다분하다.

이창호와 유창혁. 그들이 아직도 라이벌이라고 많은 이들은 믿고있다. 과연 그들의 ‘전통적인’ 시각이 옳았는지, 아니면 유창혁도 역시 수많은 이창호의 도전자들 중 하나일지 다음주면 결판이 난다.

진재호·바둑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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