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경협 러시] 현대 독주에 정부 '발만 동동'

11/11(수) 13:58

10·30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면담이후 흥분이 고조된 분위기가 차분히 가라앉고 있다. 북에서 가져온 정명예회장의 선물보따리가 과도한 기대를 부추긴다는 우려가 제기돼 대통령이 직접 분위기 진정에 나섰다.

김대중 대통령은 3일 국무회의에서 “현대에게 주의를 주었다”고 말했다. 국민들의 과잉기대를 심어주는 현대의 행보에 얼굴을 찌뿌린 것이다. 대통령의 주의를 낳게 한 계기는 석유개발사업. 시추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남북을 잇는 파이프라인 건설을 얘기하는 것은 지나치게 성급하다는 판단이다. 어디 석유개발사업 뿐인가. 북한 건설인력의 제3국 송출, 발전소 건립사업등의 실현가능성에 고개를 끄덕이는 전문가들은 많지않다. 감정적인 잣대로 재던 정명예회장의 방북성과에 이제부터 경제적인 잣대를 들이대자는 분위기다. 그래서 김대통령의 언급은 다분히 대언론용이라는 측면도 있지만 경협의 속도조절을 위해서는 대단히 시의적절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물론 이같은 분위기 반전은 김-정회담으로 금강산관광 유람선이 예정대로 출항할수 있게됐다는 안도와 포만감에서 비롯됐다. 큰 숨을 들이쉴 여유가 생김에 따라 좌우 살피지 않은채 앞만 보며 달려왔던 현대 경협사업에도 숨고르기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조성된 것이다. 정책적 측면에서도 9개월간 실험된 정경분리 원칙을 되짚어보는 것도 일보전진을 위해 필수불가결하다.

가공할 추진력을 지닌 현대그룹이 아니었다면 금강산 관광사업은 꿈도 꾸지못했겠지만 현대그룹 특유의 스타일은 또 국민과 정부의 눈을 찡그리게 만들었다. 우선 현대의 독주가 도마에 오른다. 현대가 정부를 떼어놓고 달려왔다는 것이다. 평양 실내체육관 건립사업과 석유개발사업은 독주를 설명해주는 좋은 케이스다. 강인덕 통일부장관은 정명예회장 2차방북직후인 지난달 29일 “정명예회장이 언급한 석유개발사업을 사전에 알지 못했다”고 실토했다. 6일 통일부에 대한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의 국감에서 자민련 이건개의원은 정몽헌현대건설회장을 향해 “석유개발사업을 정부와 협의하지 않은채 북측과 합의한 것은 남북교류협력법 위반행위”라고 일침을 놓았다. 이의원은 강장관을 향해 이에대한 통일부의 제재를 요구하기도 했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실내체육관 건립 합의는 김정일 면담에 대한 대가가 아니냐고 몰아부쳤다.

이같은 현대의 독주는 2일‘금강산개발비용 18일부터 북한에 송금시작’이라는 현대측 발표에서도 재연됐다. 현재 금강산개발사업은 정부의 승인을 받지 못한 사업이어서 9억4,200만달러의 개발비용을 북측에 송금할 수 없다. 그러나 현대는 통일부 승인을 기정사실로 간주, 송금방침을 일방적으로 언론에 흘렸고 통일부는 발만 동동 굴렀다.

아울러 정몽헌회장이 지난달 31일 기자회견을 통해 금강산 개발비용 대가로 6년간(72개월) 9억600만달러를 북한에 지급한다고 밝힌 점도 석연치 않은 대목이다. 통일부는 3일 국무회의 보고에서 현대가 지급해야 할 대금은 6년 3개월간(75개월) 9억4,200만달러라고 밝혔다. 결국 현대는 고의든 실수였든 3개월치를 누락, 총액에서 3,600만달러를 뺀채 발표했고 국민들은 현대에 속은 꼴이 됐다. 그런데도 정부는 당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아울러 현대가 10월 29일 합의한 당국간 대화배제를 전제로 한 분쟁해결방식 도입도 현대가 눈앞의 이득을 좇다 큰 것을 놓친 사례로 꼽힌다.

현대의 독주는 통일부의 장악력 부재와 맞닿아있다. 통일부는 풍부한 협상경험을 지닌 현대그룹 실무진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고 있다. 한나라당 이세기의원은 “9월 3일 현대가 입산료 300달러를 북한과 합의한지 나흘만인 9월 7일 정부가 이를 승인했다”며 “3일과 7일 사이에는 토요일과 일요일이 끼어있어 관계부처간 협의는 물론 자체 검토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질타했다. 2일 북측이 현대에 보내온 ‘관광세칙’도 통일부의 행정력 부재를 단적으로 드러내준다. 강장관은“관광세칙에 대해 사전에 대비를 철저히 하지못했다”고 말했다. 관광객의 행동반경및 신변안전과 직결된 관광세칙에 대해 주도면밀한 정부의 대책이 없었던 것이다. 통일부는 6일 자체 세칙안을 현대측에 전달하는 거북이 행정을 재연했다.

이같은 현대의 독주와 정부의 행정력부재와 함께 금강산관광의 근본적인 문제점도 짚어봐야 한다는 분위기도 만만치않게 조성되고 있다. 10월 23일과 11월 6일 통일부 국감은 이러한 분위기를 반증하는 자리였다. 의원들은 우선 방북성과의 거품을 걷어내고 금강산관광, 실내체육관건립, 광천수개발, 자동차라디오조립공장 건설사업등 실현가능성 사업에만 주력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금강산관광 허용에 따라 북한에 지급되는 9억4,200만달러의 군사비전용 가능성에 대해서도 눈을 감지않았다. 북한이 장사를 통해 번 돈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할수 없는 측면이 있지만 식량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군사비를 늘릴 경우 우방국들의 우려도 자아낼수 있다는 지적이다. 또 유람선 해난구조 협상, 신변안전보장에 대한 보완책의 마련도 주문했다. 백학림 북한 사회안전상 개인명의의 각서 1장이 전부인 신변보장책은 관광객들을 불안하게 만들 것이다. 현대는 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 아울러 현대와 정부가 유착하고 있다는 야당의 주장도 정부가 새겨들어야 할 것 같다. 재계가 온통 군살빼기를 통해 구조조정작업을 벌이는데도 유독 현대만이 몸집을 불리고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경협에 나서고 있는 저간의 사정은 충분히 정치적 쟁점이 부상할 수 있고 이같은 의혹은 자칫 순풍을 맞고있는 경협에 찬물을 끼얹을수도 있다.

지난 9개월간 금강산 사업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정부관계자는 “이제 걸음마를 걷고 있는 햇볕정책을 법률체계에 비유하자면 법만 덩그러니 있고 시행령과 시행규칙등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체계로 말할수 있다”며 “이 세세한 부분을 채워 나가는 과정이 현대의 금강산 관광추진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햇볕정책의 첫케이스로는 기대보다 훨씬 큰 사업이 걸려 예상보다 큰 시련을 겪었고 그만큼 세련된 모습을 갖추게됐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놓았다. 대북전문가들은 “금강산 관광추진과정에서 현대는 매 협상마다 북한에 지는 게임을 했다는 것을 이유로 무조건 비판할수 없다”며 “매 전투때마다 패배해야만 마침내 큰 전쟁을 치를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협상테이블에서 한발 양보해야만 전진할수 있는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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