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받은 상도동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

11/04(수) 11:25

“상도동의 기류가 심상치 않다.”

현 정권에 대한 불만을 공공연히, 그것도 잇달아 드러내고 있는 김영삼 전대통령의 ‘강기’ 가 정가의 화제다. 처음에는 “워낙 성격이 불 같은 분이라서…” 라는 촌평이 주류였지만 지금은 “무언가 정치적 의도가 있지 않고서는 저렇게 나설 이유가 없다” 는 견해가 다수설이다.

10월 26일 국회 재경위 국정감사에서 나온 국민회의 정한용 의원의 폭로성 발언에 대한 김전대통령측의 반응은 이런 ‘심증’ 을 굳혀주는 계기가 됐다. 정 의원의 발언요지는 “김전대통령이 임채주 전국세청장을 통해 1,000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했고, 지금은 600억원이 가·차명계좌에 남아있다” 는 것. 물론 김전대통령측은 상도동 가신출신인 한나라당 박종웅 의원을 통해 “사실 무근” 이라고 정 의원의 주장을 전면 부인했다. 정 의원에 대한 고발도 뒤따랐다.

여기까지만 했으면 “그럴 수 있겠다” 고 넘어갈 수 있었을 텐데 김전대통령측은 이 선을 넘어버렸다. “준비된 정권이라더니 준비된 보복밖에 더 있느냐” “아무 것도 없는 것을 가지고 이렇게 인민재판식으로 몰고가도 되느냐” “그렇게 뒤졌는데 1원이라도 나왔으면 이 정권이 행여 가만 있었겠느냐.”

YS, 여권 겨냥한 격한 발언 쏟아내

김전대통령측은 이처럼 여권을 겨냥한 격한 발언들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더욱이 김전대통령 본인도 “전직 대통령까지 이렇게 명예훼손을 당하는데 일반 국민들은 오죽하겠느냐” 고 말했다고 박 의원은 전했다. 이와 관련, 상도동의 한 관계자는 “정 의원이 원내 사령탑 등 당지도부와 상의없이 함부로 그런 말을 입에 올렸겠느냐” 며 “총풍과 세풍사건이 일정 부분 매듭지어지자 여권이 우리를 공격타깃으로 삼는 것 아니냐” 고 배후를 의심했다.

사실 정 의원의 발언은 “기업의 정치자금을 한푼도 받지 않겠다” 는 취임초대국민 약속을 지켰다며 이를 최대 치적중 하나로 내세워온 김전대통령에게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한’ 충격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곧바로 여권의 음해와 공작으로 해석하며 반격의 화살을 날린 데는 모종의 정치적 복선과 계산이 깔려있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김전대통령이 현 정권을 불편하게 만든 것은 이번이 세번째다. 9월 한나라당 서석재 의원과 심완구 울산시장이 국민회의에 입당하자 “민주주의 선거제도를 완전히 무시한 처사로 불행한 일” 이라며 비판했다. 나아가 “(여권이) 말로는 지역감정 극복 운운하지만 그렇게 하면 지역감정의 골이 더 깊어진다. DJ정권이 가장 잘못하고 있는 일중의 하나가 야당의 의원과 단체장을 빼가는 것” 이라고 말해 여권의 ‘민주대연합’ 구상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에앞서 3월에는 여당의 경기지사후보로 내정된 임창렬 전경제부총리가 “97년 11월 IMF관리체제가 불가피함을 김전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고 주장하자 “비애와 환멸을 느낀다” 는 표현으로 이를 공박하며 경제청문회 불출석 입장을 분명히했다. 정 의원에 대한 김전대통령측의 강도높은 대응이 결코 우연이나 단발적인 것이 아님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실제로 추석연휴를 전후해 상도동을 다녀온 인사들을 통해 전달된 김전대통령 주변 기류는 여권핵심부의 심기를 건드릴 정도로 험악했다.

PK출신 의원들 향한 ‘집안단속용’ 시각도

여기에다가 더욱 예사롭지 않은 대목은 김전대통령이 특유의 ‘자신감’ 과 ‘의욕’ 을 되찾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달말 상도동에서 3시간 동안 김전대통령과 저녁식사를 함께 한 한나라당 민주계의 한 의원은 “이제는 퇴임직후 세상사에 초연한 것처럼 보였던 YS가 아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완전히 원기를 회복한 모습” 이라고 전했다. 그는 이어 “아직은 YS가 말을 아껴야 할 때라는 생각이지만, 그는 걱정스러울 정도로 매사에 의욕을 보이고 있다” 며 “YS의 향후 거취와 관련해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가 단지 조용하고 편안하게 노후를 보내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 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남는 의문은 김전대통령은 왜 정권에 등을 지려하며 이를 통해 추구하는 게 과연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시각은 김전대통령이 향후 내각제 개헌문제 등을 둘러싼 정치적 격변기에 PK(부산·경남)지역을 기반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는 것이다. 여기엔 PK의 민심흐름에 대한 나름의 판단이 작용했고, 반(反) DJ노선의 표방도 이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이다. 김전대통령이 국민회의에 입당한 서 의원과 심 시장 등을 힐난한 것도 이런 구상을 염두에 두고 PK출신 의원들에게 던진 ‘집안 단속용’ 메시지라는 해석이다. 한나라당내 대다수 민주계가 김전대통령 퇴임후 여전히 새로운 구심점을 찾지 못한 채 당의 변두리를 배회하고 있는 현실은 김전대통령의 이같은 역할을 위한 일말의 공간을 제공하는 측면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사실 민주계 의원들은 “정권교체후 민주계 중진들이 각기 살길을 찾아 지리멸렬한 상황에서 김전대통령과의 감정적 앙금이 해소되지 않은 이회창 총재측과 당장 손을 잡을 수도, 그렇다고 비주류에 가담하기도 어려운 입장” 이라고 고충을 토로하고 있다.

“더이상 건드리면 가만있지 않겠다”

두번째는 굳이 무엇을 이뤄보겠다는 의도보다는 ‘방어를 위한 자구책’ 의 성격이 강하다는 견해다. 다시 말해 현 정권이 자신을 경제청문회에 세우는 등 여권의 정국주도를 위한 ‘희생양’ 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것. “더 이상 나를 건드리면 행동으로 대응하겠다” 는 경고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얘기다. 이대로라면 PK의원들에 대한 김전대통령의 집안단속은 그저 이 경고에 현실적 힘을 싣기 위한 포석이 된다. 이같은 시각의 저변에는 “김전대통령이 지금의 이미지로 막후(幕後)든, 막전(幕前)이든 정치에 복귀할 수 있겠느냐” 는 회의론이 깔려있다.

김전대통령의 속내가 과연 무엇인지는 내년초부터 본격화할 것으로 예상되는 내각제 논쟁의 와중에서 1차적으로 가늠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유성식· 정치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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