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기행] 시리도록 아름다운 "여기가 금강"

12/02(수) 14:56

주간한국 이광일(취재) 김명원(사진) 두 기자가 지난달 20∼24일 4박5일간 금강산에 다녀왔다.

두 기자는 18일 출발한 1차 관광팀에 이은 2차 관광팀의 일원으로 현대봉래호를 타고 동해항을 떠나 금강산과 장전항, 온정리 주변 일대를 둘러봤다. 2차 관광팀 680여명에는 1차때와 달리 특히 실향민이 적었고 전후에 태어난 사람들이 많았다.

62년 서울서 태어난 이기자의 젊은 눈에 비친 금강산과, 금강산변에서 부딪친 북한의 인상을 화보와 함께 소개한다./편집자주

<첫날 구룡폭포>

“금강산 관광객들을 동포애의 심정으로 환영한다” “민족의 자랑 금강산” . 입국 수속장 앞에 흰 바탕에 특유의 붉은 글씨로 쓴 입간판이 이북 땅에 들어섰음을 실감케 한다.

초겨울답지 않게 청명한 아침. 시리디 시린 공기가 가슴속 찌든 때를 씻어낸다. 11시쯤 관광객을 태운 현대측 버스는 쌀쌀함을 가르며 금강산을 향한다.

2차선 치곤 좀 넓은 시멘트 포장도로. 양쪽으로 철조망이 버스 높이만 하다. 그 너머로 군인들이 부동자세로 서 있다. 오른쪽 철로 너머론 이 일대 간선도로인 듯한 넓은 포장도로가 보인다. 자전거 타고가는 이, 아이를 앞세워 걸리며 종종 걸음치는 어머니, 높이 뽑은 연통에 매연 풀풀 뿜으며 터덜거리는 낡은 트럭…. 산하는 전혀, 전혀 낯설지 않다. 나는 강원도 어느 산골을 지나고 있는 것이다.

차창으로 처음 가까이 마주한 주민들은 블록 집을 짓고 있다. 드문드문 서 있는 민가는 허연 페인트 칠이 누렇게 바랬다. 손을 흔들어본다. 모르는 척 일에 열중하기도 하고 마주 손을 흔들어주기도 한다. 가슴이 뭉클하다. 평범한 관광객이 현지인의 환영을 받을 때 느끼는 유쾌함이 아니다. 하기야 돌아오는 길에 대여섯살쯤 돼 보이는 계집아이가 저 멀리서 내게 손을 흔들었을 때 나는 서울에 두고 온 딸 아이를 두 눈 가득 넣고 있었다.

문득 남루한 작업복에 초췌한 행색들이 마음에 걸린다. 멀리 굽이쳐내리는 금강산 자락의 울끈불끈한 윤곽 아래로 사람들의, 집들의 ‘남루함’ (이 글을 읽으시는 이북 형제들은 부디 이 표현을 얕잡아보는 말이라고 노여워하시지 말기를 간곡히 바란다)에 착잡함과 분노같은 것이 불끈 치민다. ‘왜, 이 지경이 됐을까….’ 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모호한 감정은 무엇 때문일까? 나는 금강산에 왔는가? 북한에 왔는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여기가 금강”

구룡폭포 오르는 길이 시작되는 온정리 초입 왼편 저 아래 신계사 계곡에서 울려퍼지는 아우성을 들으면서야 비로소 이런 상념은 사그라들었다.

온정리(溫井里)는 이번 관광코스인 외금강 일부와 해금강으로 가는 길이 시작되고 끝나는 곳. 온천이 좋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곳곳에 이백년 이상 됨 직한 미인송(美人松)들이 울울창창 하늘 높은 줄, 땅 넓은 줄 모른다.

산길은 나지막히 오른다. 등산로라기보다는 산책길이라 할 만하다. 누군가 힘들여 깔았을 계단석들이 삐뚤빼뚤 정겹다.

이마에 진땀이 스밀 즈음 목란다리를 만났다. 벌써 저 아래 평지에서 차창으로 내다본 실개천부터가 그랬지만 다리 아래로 펼쳐진 계곡은 ‘여기가 바로 금강이여!’ 라고 외치는 듯하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이었다. 그리고 물은 다시 물이 아니었다. 옥구슬 수정구슬이요 금강석(다이아몬드)이었다. 구슬은 햇살 비쳐 희디 흰 바위에 거북등 갈라져나가듯 물 그림자를 아른아른거리게 한다. 눈이 시리도록, 부시도록 찬란한, 찬란한 옥빛…. 짙고 짙어 속을 알 수 없는 검푸른 녹색에서 여린 연두빛으로, 다시 아래 바위색을 그대로 되비친 뿌연 투명함 사이로 오가는 그 옥빛은 바로 천년전 고려 사람들이 청자에 담아갔을 푸르름이다. 하기야 그때라면 금강이 아니라도 이 산하 어지간한 계곡의 물빛이 다 이러했으리라.

드디어 옥류동(玉流洞)에 닿았다. 위쪽으로는 58m나 이어지는 누운 폭포가 쏟아져 나리고 그 끝 물살이 포말을 흩뿌리며 떨어지는 곳에 옥류담이 시작된다. 넓이 630㎡, 깊이 6m로 금강산에서 가장 큰 담소란다. 옥류담은 아래쪽 오분의 삼 정도가 꽁꽁 얼어 새하얗고 폭포 물살 빠져드는 입구쪽만 짙은 옥빛이다. 그 중간에는 어름이 갈라져 둥둥 떠다니는 것이 용비늘 같다. 폭포물 쏟아내리는 넓디 넓은 바위터는 온통 우윳빛. 이 부드러운 돌미끄럼틀을 타고 선녀들이 저 아래 옥류담으로 깔깔거리며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물소리가 웃음소리다.

옥류동 계곡, 선녀들의 웃음소리 들리는 듯

일찌기 1923년 여름 서른둘 창창한 나이의 이광수가 내금강 만폭동을 두고 한 묘사가 여기에도 제격일 듯 싶다. “큰 폭포가 좁은 담에 떨어질 때에 깨어져 진주가 되고 흩어지는 비가 되고, 작은 폭포가 넓은 담에 내려올 때에 청룡 흑룡이 조는 듯한 고요한 담이 됩니다. 깊은 길로 달릴 때는 쿵쿵쿵 울리고, 얕은 데로 흐를 땐 재갈재갈 지저귑니다. 작은 물소리 큰 물소리, 떨어지는 소리, 솟아 오르는 소리, 바위에 부딪는 소리, 자갯돌을 차고 넘는 소리, 그 소리를 되울려 오는 바윗소리, 산의 소리, 모든 것이 합하여 웅대한 오케스트라를 이룹니다.”

하여 산은 물이 되고 물은 다시 소리, 소리, 소리가 된다.

이 함성의 적막을 느닷없이 옆에 있는 한 기자가 깼다. “천하의 연산군도 바위에 제 이름 새기는 짓은 하지 않았는데… 안그래요? 쯧쯧.” 멀리 저 아래 왼편으로 옥류동이 굽어보이고 구슬같은 담소 두 개를 실로 꿰어놓은 듯한 연주담(連珠潭)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앙지대(仰止臺)에서 맞은편으로 단독바위에 새긴 “위대하신 김일성 수령님…” 운운하는 붉은 글씨들을 보고 하는 말이다. “왜요, 많이들 했지요.” “…?” “발 아래 보세요.” 옛 과객들이 재미삼아 파놓았을 한자이름들이 그야말로 새까맣다. 옥류동이 한눈에 올려다보이는 너럭바위도 그랬고 더 올라가 구룡폭포 깎아지른 절벽 오른편 아래 총석정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 김기진이 1919년에 새겼다는, 길이만도 40㎙는 족히 넘을 법한 ‘彌勒佛’ (미륵불) 세 글자도 그랬다. 그 사람, 좀 머쓱한 모양이다.

그러나 오해 마시라. 뉘라서 이 붉은 글자들을 무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으리오. 다만 오기전 예상과는 달리 산 정면이나 절경에 새긴 것은 극히 드물고 길 양편 단독암에 새긴 것이 대부분이서 그나마 참으로 다행이라는 얘기다. 이런 상처들도 옛사람 이름처럼 눈비 맞고 바람에 시달리다보면 먼 훗날 인간세의 탐욕을 희미하게나마 전해주는 흔적이 될 터….

구룡폭포에서 일만이천봉 기약하며 발길 돌려

이런저런 생각에 구슬땀을 훔치다보니 어느덧 구룡(九龍)폭포가 나를 반긴다. “천 길 흰 비단, 만 섬 진주 알” (千丈白練 萬斛眞珠). 신라때 대학자 최치원(857∼?)은 폭포 주변 너럭바위에 이렇게 새겨놓았다고 한다. 예서 더 무슨 말이 소용있으랴? 폭포 길이가 83m라고? 그 아래 시퍼런 구룡담의 깊이가 13m나 된다고? 다 쓸데 없는 소리였다!.

한여름이었다면 진주알들은 큰 낟알로 차가운 포말로 얼굴까지 튀고 날았을 것이건만 지금은 눈어름 비단에 아롱아롱 새하얗게 달라붙어 있다. 한가운데로 아직 얼지 않은 가녀린 물줄기가 그런대로 폭포소리를 전한다.

이 너머가 금강 절경중에도 절경이라는 상팔담(上八潭). 선녀와 나뭇꾼의 전설이 깃든 곳이다. 다시 그 너머로 한참을 오르면 금강의 맨꼭대기 비로봉이 지척이란다. 거기서 내려다보일 구름바다에 쌓인 일만이천봉우리들….

그러나 아쉽게도 길은 예서 끊겼다. 눈과 얼음 때문에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다.

<둘쨋날 해금강>

아침부터 기분이 착잡했다.

다시 온정리에 들어 고위 간부들의 휴양소라는 김정숙기념관 앞을 지나면서부터였다.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라는 입간판이 나의 심사를 어지럽혔다.

왜 그랬을까?

“조선 인민의 경애하는 수령…” “작업도 생활도 항일유격대 식으로” “김일성 수령님을 중심으로 하는 혁명의 수뇌부를 사수하자” 운운하는 붉은 구호들도 그저 그냥 뻘건 글씨로만 망막에 스치고 말았는데, 낡은 흑백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그냥 지나쳐버리고 말았는데 왜 “웃으며 가자” 는 말이 한구석에 와 걸리는 걸까.

어젯밤 관광선 현대봉래호에서 허연 속살을 드러내고 랩댄스곡에 맞춰 넓적다리를 번쩍번쩍 올려대던 늘씬한 러시아 미녀들의 쇼를 보았다는 쑥스러움 때문일까, 아니면 꾸역꾸역 먹어대다 못해 접시 가득 남기고 만 기름진 음식에 대한 죄스러움 때문일까…. 그 입간판은 웬지 나를 불편하게 했다. ‘아니다, 그럴 필요 없다. 우리도 IMF에 점심 굶는 학생 많고 여기 오는 관광객도 땀흘려 번 돈으로 모처럼 딱 사박오일 오는 것이 아닌가? 그래, 그렇게 위안 삼자.’

딱 접고 해금강에 들었다.

가는 길에 삼일포의 절경을 둘러본 뒤 북한측 비무장지대의 철문을 차로 통과해 동해 바다끝 해금강에 온 것이다.

금강산 봉우리 봉우리들을 한껏 줄여서 바다에 그대로 옮겨놓았다더니, 과연 그 이름이 헛되이 전해진 것이 아님을 알겠다. 푸른 바다가 푸른 하늘과 맞닿은 멀리까지 기암괴석 더미가 즐비하고 그 위로 갈매기들이 혹은 앉고 혹은 선회하며 창공을 누빈다.

대뜸 물가 펑퍼짐한 돌 위에 걸터 앉아 발을 담갔다.

파도소리가 울퉁불퉁한 바위 틈 따사로운 햇살을 뚫고 솟은 낙락장송 위로 퍼져나갔다가 되돌아오곤 한다. 하얀 바위에 푸른 소나무. 정선과 김홍도의 진경(眞景)산수화에 등장하는, 인왕산에서 북한산에서 설악산에서 낙산에서도 보던 그 바위에 그 소나무들…. 유달리 곧고 잎의 윤기는 조선 처녀 머릿단처럼 뽀얗다.

미역이며 파래가 바위아래 지천

옛사람들이 말한 바 ‘조선의 마음’ 을 여기서 보는 듯하다. 만물상에서 본 바위 틈의 소나무가 그랬고 구룡폭포 위로 천길 낭떠러지 위에서 만학천봉을 드문드문 푸르게 물들인 소나무들이 그랬다.

시리다. 발이 얼어붙는 것 같다. 망둥어 새끼가 얕은 물 모래 위로 기어다닌다. 바위 아래 붙은 소라를 떼려니까 딱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안한다. 바닷물이 계곡물 못지 않게 맑다. 찝지름하지 않고 짭짜름하다. 미역이며 파래가 길가 백사장 바위 바로 아래까지 지천이다. 어느새 언 발이 스스로 녹는다. 불가사리를 잡았다 놓아줬다.

“아저씨, 발 시리지 않아요?” 웬 입술연지 뻘겋게 칠한 젊은 여자가 다가와 묻는다. “시리라고 하는 거예요.” 대답이 이상한 모양이다. 내가 생각해도 우문우답이다.

허옇고 시커먼 구름들이 저 멀리 남쪽으로 뭉게뭉게 펼쳐져간다. 예서 우리측 통일전망대가 멀지 않다고 한다. 삼일포에서 넘어오는 길에 줄곧 은은히 들려오던 그 괜시리 비장한 북한측 ‘혁명가요’ 소리도 이젠 파도에 묻히고 말았나보다.

배를 타고 육지쪽을 바라보는 해금강이 진짜라는데 바다쪽만 내다봐야 하니…. 게다가 북쪽으로 한참을 올라가서 그토록 많은 그림으로만 남은 총석정도 못보고 무슨 해금강을 봤다고 하랴만, 그래도, 그래도 역시 바다금강이다.

선착장 가는 길에 버스 일행중 한 대가 눈 녹은 진탕길에 빠져 한참을 차 안에서 보냈다. 저녁 6시가 채 안됐는데 초생달이 검푸른 준령들 위로 낼름 솟았다. 다시 그 삐죽삐죽한 준령 테두리 위로 희뿌연 눈에 저녁 안개가 푸르스름하게 서렸다. 그 너머 고봉들은 짐작으로만 보이는 듯하다. 사위에 어둠은 짙어만 가는데 불빛이라야 가끔 한두점씩 희미한 것이 북한의 전력 사정이 안좋다는 얘기가 맞기는 맞나보다.

<셋째날 만물상>

만물상 기암괴봉들을 뒤로 한 채 온정령(溫井嶺) 백스무굽이를 휘돌아가며 걷는다. 한참을 혼자 뒤쳐져 한하계(寒霞溪)를 왼쪽, 오른쪽으로 번갈아 끼고 내려가는 고갯길. 무인지경 금강산이다.

지줄대는 물소리만이 벗한다. 산 그늘이 계곡 아래까지 늘어질 무렵의 늦은 오후. 눈 덮인 개골(皆骨)에는 차디찬 햇살이 쨍하다.

눈 감고 가만히 멈춰 서 본다.

바람 소리, 산 소리, 하늘 소리, 새 소리가 언뜻언뜻 섞여들다간 다시 쏴아 하는 물소리에 쓸려나간다. 그 소리는 유혹의 말을 살갑게 속삭인다. 어느 때는 청산처럼 말없이 살라 하다가 금세 창공처럼 티없이 살라 한다. ‘아, 그런가…’ 싶으면 또 귓속까지 낼름 다가와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나 가지 하고 사분거린다.

아무데서나 가부좌 틀고 앉으면 한 소식 들을 것만 같고 한 도(道) 깨칠 것만 같다. 신선이 와 놀고 부처가 현신했다는 전설들이 말 좋아하는 후세인들의 과장만은 아니겠다. 율곡이 나이 스물에 사임당을 여의고 생로병사의 굴레를 떨치려 금강을 찾았다는 얘기가 과시 그럴 만도 하겠다.

하늘이 뻥 뚫리면서 사방으로 기암괴석

두어 시간 전쯤. 온 몸을 땀으로 목욕하고 하늘문이라 이름붙은 두 거대한 바위의 좁디좁은 틈새를 지나 천선대(天仙臺·해발 936㎙)에 오른 순간, 하늘이 뻥 뚫리면서 느닷없이 사방에서 솟아오른 만물상의 기암괴석들도 그런 유혹의 소리를 쌩 하는 바람결에 실어보냈다.

저 멀리 햇살 한아름 안은 곰바위가 “잘 지내?” 하고 농을 건네는가 싶으면 그 건너편 흰 눈 머금은 귀신바위는 “발 조심 하시게” 하고 점잖게 다가선다. 그도 잠시, 사방 하늘가로 둘러가면서 창이며 칼이며 독수리며 토끼며 호랑이며 나비처럼 솟은 온갖 형상들이 한꺼번에 “으하하하하하하하…” 하고 비웃는다. 천선대 정상에서 “야호!!!” 운운하는 우리 인간들이 가소로운 모양이지.

환각이었을까? 하기야 만물상(萬物相)이라는 것이 절로 그렇게 요모조모 이리저리 삐뚤빼뚤 삐죽뾰죽 생겨났건만 사람이 괜시리 세 신선이 놀던 바위(삼선암)니 나뭇꾼이 열받아 도끼로 쪼갠 바위(절부암)니 귀신얼굴 바위(귀면암)니 하며 저마다 보는 자리 따라 다 다르게 이런저런 이름을 갖다붙인 것 아닌가. 그저 “기암괴석이구먼” 한 마디면 족할 일을 부질없이 수고롭게 일만이천봉에 일일이 작명을 해주는구나.

내려오는 길에 만난 한 북한 지도원(이들은 관광가이드가 아니다)은 악수를 청하는 관광객에게 “우린 악수 안합네다” 고 빼다가 “고럼, 이렇게 하문 되지요” 하며 와락 끌어앉는다. 다들 기분좋게 웃었다. 그는 “매년 한번씩 오시라요” 라는 말을 웃음에 덧붙인다.

남남북녀란 말이 맞다. 만나는 여성 지도원들은 하나같이 고왔다. 길을 잘못 든 나에게 스물 남짓할 것 같은 지도원이 “선생님, 고기는 길이 아닙네다” 라고 친절하게 일러준다. 어감이 정겹고 간절하다. 소설가 박범신이 1차 금강산 관광을 마치고 와서 쓴 글에 이 여성들을 두고 “조선의 누이” 를 만난 기분이라고 했는데 과연 그랬다.

금강산은 50년전 그모습 그대로 우리에게…

이상한 일이다. 이곳에서 만난 이북 사람들의 말씨는 그렇게 정겹고 간절할 수가 없다. 거의 비슷한 귀순자들의 말씨를 서울에서 들을 때는 뭔가 거슬리는 느낌이었는데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걸까. 대개는 똑같이 북한 표준어인 문화어인데 뭐는 귀에 거슬리고 또 뭐는 그렇지 않단 말인가. 오지 못하던 땅에 어렵사리 와서 너무 감상에 젖은 걸까.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니 아하, 알겠다. 내가 서울 사람이어서인지 서울서 듣는 남도 사투리는 썩 귀에 순하지 않다. 그러나 경상도에 가서 듣는 경상도말, 전라도에 가서 들리는 전라도말은 그토록 정겨웠던 것과 같은 이치겠구나.

사흘간의 여정은 말 그대로 주마간산이었다. 아니 여정이라 할 만한 느낌의 무르익음조차 없었다. 마음은 저 멀리 앞서만 가고 돌아갈 날은 분초를 재촉했다. 내금강과 비로봉은 쏙 빼놓고 외금강과 해금강의 저 아랫동네 작은 몇 조각, 그것도 풍악의 화려한 의상은 다 벗겨지고 개골의 은빛이 온 산을 단장하기 전의 ‘썰렁한’ 금강을 보고 나는 금강을 느껴야 했다.

어쩔 수 없는 분단 조국의 한국인이어서일까. 그래도, 그래도, 금강은 좋았다. 참 좋았다. 금강산은 그곳 형제들과 함께 50년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따뜻하게 맞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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