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년 토끼해] '꾀' 많은 토끼 앞의 '종이 호랑이'

12/30(수) 11:50

99년은 기묘(己卯)년, 토끼해다.

정확히 말하면 음력 새해가 시작되는 99년 2월 16일부터다.

띠동물 토끼는 한국인에게 어떤 이미지로 남아 있을까.

우선 동요 ‘반달’에서처럼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로 등장한다. 옛 사람들은 밤 하늘의 달을 보고 계수나무 아래서 불로장생의 약방아를 찧는 토끼의 모습을 그리면서 천년만년 평화롭고 풍요롭게 사는 이상세계를 꿈꾸어왔다. 달 속의 토끼는 장수의 상징이자 달의 정령이다.

반면 겁많고 약하고 미련하고 순진하고 융통성 없는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넘기는 꾀보의 면모를 과시하기도 한다.

토끼는 쥐 소 호랑이에 이어 12마리 띠동물(12지) 가운데 네번째 동물. 12지(支)를 동물로 배열한 나라는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 멕시코 인도 등이 있다. 그러나 베트남에서는 토끼 대신 고양이(猫), 멕시코에서는 호랑이 토끼 용 원숭이 개 돼지는 우리와 같고 나머지 6가지는 다르다. 인도에서는 호랑이 대신 사자, 닭 대신 공작새를 배치한다. 서양에서는 주로 별자리를 사용한다.

우리나라 지역 역사유물에서 토끼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낙랑고분이다. 이 고분에서 나온 원형 은판에는 두꺼비와 옥토끼가 그려져 있다. 은판 자체가 달을 상징하며 옥토끼는 네 발로 서서 두꺼비쪽을 돌아보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또 그림벽돌에서는 약초사발로 보이는 물건을 든 괴인(怪人)과 작은 절구를 쥐고 오른쪽 앞발로는 공이로 선약(仙藥)을 찧는 토끼가 표현돼 있다. 이 벽돌에 그려진 토끼는 중국에서 많이 만든 서왕모(西王母·중국 신화에서 곤륜산에 산다는 반인반수의 여자 선인·仙人) 그림벽돌에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영물이다. 서왕모 왼쪽과 오른쪽에는 토끼 한 쌍이 무엇인가를 거르거나 절구 속의 재료를 찧고 있다. 서왕모는 무병안녕 장생불사와 관련된 존재다. 따라서 토끼들이 손대고 있는 것은 불사약으로 추정된다.

이런 맥락에서 국립문화재연구소 천진기 학예연구사는 “달-계수나무-토끼 설화는 고대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주 즙안 지역 장천 1호분(5세기 후반)을 비롯한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달에서 약찧는 옥토끼가 두꺼비와 함께 등장한다.

신라 토우와 통일신라 시대 수막새 기와에도 토끼가 나타난다.

고려 시대에 오면 인신수두(人身獸頭·몸은 사람 모습이고 머리는 동물 모양인 것) 형태의 통일신라 시대 12지신상과 달리 사람의 모자 장식에 각 신상을 그렸다. 고분 벽화 관모 윗장식에 토끼를 올려 놓는 식이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도 토끼는 심사정 최북 김득신 같은 유명화가 작품은 물론 민화에 많이 등장한다. 민화의 토끼는 다정하고 화목한 관계를 상징해 두 마리를 한 쌍으로 그리는 것이 특징이다.

12지의 토끼는 방향으로는 정동(正東), 시간으로는 묘시(오전 5∼7시), 달로는 음력 2월을 지키는 신이다.

그러나 구비전승에 등장하는 토끼는 동물학적 특성에서 유래된 다채로운 이미지를 보여준다.

대표적인 것이 지략담. 예를 들어 거북의 꾐에 빠진 토끼가 용궁까지 갔다가 꾀를 써서 빠져나온다는 ‘구토(龜兎)설화’의 경우다. 국립민속박물관 오세길 연구원은 판소리 수궁가, 고대소설 토끼전으로 정착한 이 설화가 “억압받는 민중들이 동물세계의 약자인 토끼를 통해 그들이 처한 현실을 부정하고 승리자가 됨으로써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의 결과”라고 해석한다.

토끼 이야기에 녹아든 지배층에 대한 저항의식은 세계적인 분포를 보이는 ‘호랑이 꼬리로 물고기 낚기’라는 민담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평안북도 구전설화. “(전략) 어느 겨울날 토끼가 호랑이에게 강에 가면 물고기가 수없이 많으니 꼬리를 물 속에 담그고 무거워질 때까지 있다가 올리면 많이 잡을 수

있다고 했다. 호랑이가 시키는대로 했더니 이내 꼬리가 물 속에서 얼어버렸다. 호랑이가 물고기가 너무 많이 붙어서 꼬리가 올라오지 않는다고 하자 토끼는 ‘이 무지한 호랑아. 네가 나를 잡아먹으려고 해서 너를 죽이려고 그런 거다. 너는 내 꾀에 죽게 된 것이다’라고 조롱했다.”

지략담 유형에서 토끼는 일방적으로 승리를 거두고 강한 자를 응징하지만 경쟁담에서는 항상 패배자로 등장한다. 대표적인 예가 ‘두꺼비의 나이 자랑’ 설화. “옛날 옛적 토끼, 거북, 두꺼비가 서로 나이 자랑을 했다. 먼저 토끼가 자기는 천황씨(天皇氏·중국 신화의 등장인물)때 세상에 나왔다고 하면서 자랑했다. 그러자 거북은 그보다 더 먼저인 반고(盤固·중국 신화에서 천지개벽때 처음 태어났다고 하는 전설상의 천자)때 이 세상에 나왔다고 답했다. 그런데 두꺼비가 갑자기 엉엉 울기 시작했다. 토끼와 거북이 이유를 물으니 ‘너희들이 천황씨 반고씨 하고 있으니 나는 반고씨때 죽은 아들 생각이 나고 천황씨때 죽은 손자 생각이 나서 운다’고 답했다.”

이밖에 토끼는 희생정신과 신성성, 나약하고 보잘 것 없고 교만하면서도 특히 경망스러운 존재로 나타나기도 한다.

IMF 시름이 깊어지는 올해 토끼가 달세계와 같은 평화와 현명한 지혜만을 선사해주기를 기대해본다.

이광일·주간한국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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