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일인지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고도 간절한 일이야. 날렵한 끌이나 기능 좋은 쇠붙이를 가지지 못한 나는, 그저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서 손끝에 모으고, 생애를 기울여 한 마디 한 마디, 파나가는 것이다”

최명희(崔明姬)씨의 대하예술소설 ‘혼불’(한길사 발행)은 작가의 이 말처럼 그렇게 생애를 기울여 ‘사무치게 갈아 새긴’ 작품이었다. ‘대하예술소설’이란 극찬을 들은 ‘혼불’의 작가 최씨가 지난 11일 오후5시 서울대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2년여 투병해오던 난소암합병증 때문이었다. 향년 51세.

“일필휘지(一筆揮之)를 믿지 않는다. 언어는 정신의 지문(指紋)이다”

최씨의 삶과 문학은 그가 남긴 이 말에 담겨 있다. 그는 뼈를 깎고 살을 바르는 듯한 혼신의 자세로 혼불을 썼다. 80년 등단 이후 초기에 단편소설 몇 편을 쓴 것 외에는 17년동안 혼불집필에만 전념했다. 마치 가느다란 명주실을 한 올 한 올 짜서 거대한 벽화를 그려나가듯 한 시대 한국인의 역사와 삶과 정신을 문학으로 복원해냈다.

혼불은 일제시대인 1930년대 이후 해방까지 전북 남원의 매안 이씨 가문에서 무너지는 종가를 일으키려는 종부(宗婦) 3대(청암부인, 율촌댁, 효원)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일제의 수탈과 근대사의 격동 속에서 양반사회의 기품을 지키려는 주인공들의 노력, 한편으로 평민·천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서럽게 살면서도 민족혼의 회복을 위해 몸부림쳤던 민중의 피와 눈물이 배어 있다.

혼불은 사건, 인물 중심의 소설이 아니다. 서사시의 장중함과 판소리의 흥이 있는 이야기다. 작가가 철저한 자료 수집과 고증, 중국현지답사 등을 바탕으로 요즘 감각으로는 따라 읽기도 힘들 만큼 꼼꼼한 문체로, 보석처럼 숨겨진 우리말을 찾아내고 조탁해 전래의 세시풍속 관혼상제 음식 노래와 관제(官制)등 생활사와 풍속사를 기록한 이 소설은 그대로 생생한 한국학·민속학 자료이다.

47년 전주에서 태어나 전북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서울 보성여고 교사로 재직하던 최씨는 80년4월 혼불의 첫 장을 썼다. “쓰지 않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라며 자신이 선택한 작업에 괴로워하면서도 그는 ‘저희끼리 간절하게 타오르고 있는 한 시대와 한 가문과 거기 사람들의 쓰라린 혼불들, 그 불길이 소진하여 사윌 때까지 충실하게 쓰는 심부름꾼’의 역할을 자임했다. 그의 창작은 곧 거칠고 험한 시대를 살아야 했던 우리의 조상, 한국인들의 아직도 떠돌고 있는 혼들에 대한 해원(解寃)이었던 것이다.

96년12월 혼불이 5부 전10권으로 완간된 후 문화예술계는 물론 한승헌(韓勝憲)감사원장, 고건(高建)서울시장, 강원룡(姜元龍)크리스챤아카데미이사장등 각계인사 100여명이 ‘작가 최명희와 혼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모임을 결성했다. 94년 미국 뉴욕주립대에서는 최씨의 초청강연록 ‘나의 혼, 나의 문학’을 고급한국어 교재로 채택했다. 최씨는 97년 단재상(문학부문)과 세종문화상, 전북대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고 올해는 여성동아대상, 호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최씨는 해방 이후 50년대까지를 배경으로 혼불 6부의 집필을 계속하려 했지만 끝내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 5부를 집필중이던 96년8월 발병한뒤 97년1월부터 병세가 악화했다. 독신으로 산 그는 가족과 몇몇 지인 외에는 이 사실을 전혀 알리지 않은채 외롭게 투병해왔다. ‘동구 밖 길가의 나무장승처럼 서서’ 한국인의 보이지 않는 넋을 달래려 했던 최씨는, 그의 바람대로 한국문학사에 남을 혼불과 함께 ‘모국어의 바다’로 흘러갈 것이다.

하종오·문화과학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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