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여성은 헌신적인 남자를 그리워 한다?’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자기를 사랑해주는 남자를 싫어하는 여성은 별로 없지만 요즘은 백마 타고 홀연히 나타나 막강한 힘을 휘두르는 왕자에게는 조금은 싫증난 모양이다. 가부장적인 권위를 내세우며 여성들에게 무조건 받으려고 하는 남성중심의 질서에 숨막혀온 여성들은 ‘아낌없이 주기만 하는’ 평범한 남자가 오히려 그리운듯 하다. 순결하고 선량한 남자가 바치는 헌신적인 사랑은 상상만으로도 기분좋다.

영화는 현실을 반영하는가. 올해 여성관객들을 울린 3편의 한국영화속 남자들은 한결같이 이런 헌신적 사랑을 실천한다.

<8월의 크리스마스>(허진호감독)의 한석규, <약속>(김유진감독)의 박신양, 그리고 <남자의 향기>(장현수감독)의 김승우가 바로 그렇다. 영화속 세 남자는 상대여성들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는 헌신적인 사랑을 바치고 사랑을 완성한 후 죽어간다.

이들은 예전 멜로영화의 남자주인공들이 내세워온 에로틱한 매력은 거부한다. 대신 아이같은 순결한 웃음과 이웃집 오빠같은 편안함, 그리고 애틋한 이미지를 무기로 여성팬들을 사로잡고 있다.

먼저 <8월의 크리스마스>의 한석규. <닥터봉> <은행나무 침대> <초록물고기> <넘버 3> <접속>등 출연작 전부를 흥행에 성공시킨 최고의 스타다. 자신의 표현 그대로 ‘배우같지 않은 평범한 얼굴’이지만 영화인들은 그가 평범한 역할조차 특별하게 보이도록 하는 독특한 개성을 지녔다고 말한다. 그는 남다른 성실성과 역할에 깊이 빠져드는 프로정신으로 스크린에서는 누구보다 강한 개성을 발휘한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그가 맡았던 배역은 사진관 주인. 백혈병에 걸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제는 비련의 주인공도 남자가 되어야 하는가 보다. 지난해 흥행에 성공한 <편지>에서도 남자주인공이 죽어갔다.

그는 우연히 주차단속원 심은하를 만나 마지막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인생의 끝에서 방황하는 어두운 이미지가 아니다. 사진관을 찾는 고객들을 대하는 그의 시선은 평화롭고 건강하다. 그 자신 절박한 상황임에도 자기를 염려하는 심은하를 더 걱정한다. 그의 희생적이면서도 차분한 분위기에 여성관객들은 손수건을 꺼내든다.

<약속>의 박신양도 평범한 얼굴을 오히려 강점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한석규와 맥을 같이 하는 배우다. <유리>에서 고난의 짐을 짊어진 구도자의 모습으로 데뷔했지만 조금 불거진 눈두덩이를 안경알로 가리고 가녀린 선을 오히려 전면에 내세우면서 멜로 배우로의 변신에 성공했다.

박신양은 이 작품에서 깡패조직 보스로 나왔다. 상대파의 습격을 받고 병원치료를 받는 도중 여의사(전도연)와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죽음을 앞둔 한석규가 이상하리만치 차분한 분위기인 것과 흡사하게 박신양도 전혀 깡패같지 않은 소탈한 모습이다.

혹 자신때문에 사랑하는 여인이 해를 입지 않을까 염려해 헤어질 것을 다짐하기도 한다. 70년대 유행어였던 ‘사랑하기때문에 헤어진다’를 연상시키는 전형적인 멜로다. 깊은 그리움으로 사랑은 더욱 불타오르지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주춤거린다. 상대파의 도발로 부하들이 희생되자 자신이 나서 상대파 두목을 죽인다. 살인혐의를 자청해 뒤집어쓴 심복을 구하기 위해 자수를 결심한다. 결국 그는 사랑하는 여인과 이별해야 한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사랑을 확인하는 성당앞 10분간의 라스트신은 여성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히트작은 아니지만 <남자의 향기>의 김승우도 빼놓을 수 없다. 가장 헌신적인 사랑이다. 오로지 연인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기 때문이다.

김승우는 터프한 사내지만 여자앞에서는 순수하고 헌신적이다. 어릴 적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온 소녀(명세빈)에 대한 사랑은 맹목적이고 절대적이다. 그녀가 삶의 목적이다.

그 소녀를 성폭행한 동네 불량배에게 보복해 소년원에 가고, 그녀를 위해 폭력조직의 보스가 된다. 명세빈이 매일 구타만 하는 남편을 살해하자 그 죄를 뒤집어 쓴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사랑하면서도 사랑한다는 말을 못한다는 것이다. 그보다 더 슬픈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먼저 죽는 일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랑한다는 말조차 가슴에 묻고 이승을 떠나는 남자. 촉촉한 눈길과 귀여운 미소, 정감넘치는 비음은 여성관객들의 연민을 자극한다.

지난해 <편지>로부터 이어지는 한국 멜로영화들은 대부분 현실에서는 좀처럼 찾을 수 없는 순수한 사랑과 모든 여성들이 꿈꾸는 헌신적 남성상을 스크린에 재현시킨다. ‘꿈에 그리던 남자를 화면에서나마 만나 보라’는 듯.

최근 개봉된 멜로영화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도 비슷하다. 야구심판역의 임창정은 톱탤런트(고소영)를 상대로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하지만 먼저 접근하지 못하는 수동적인 성격이다. 60여통의 편지를 보내고 ‘사랑은 소풍처럼 기다리는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다’는 고소영의 말을 되새기기만 한다. 야구장에서 유난히 큰 목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고 안타까운 노력을 할 뿐이다. 이 영화는 결국 톱탤런트가 야구심판의 사랑을 받아들이면서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남자의 사랑은 헌신적이다.

선량한 남자의 헌신적인 사랑을 공통분모로 하는 이 작품들이 예외없이 흥행에 성공하는 것을 보면 역시 각박한 현실속에서 모든 여성들이 헌신적인 남자에 목말라 있는 것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헌신이 항상 아름다운 사랑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상대방이 거부하는 순간 그 사랑은 졸지에 스토커의 기행으로 전락하기 때문에.

홍덕기기자·일간스포츠 연예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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