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한국 최고의 스턴트맨 정두홍

08/10(화) 23:28

남들이 말하는것처럼 나는 ‘독한 사람’이거나 ‘잔인한 사람’일지 모른다. 다분히 그렇게 비칠만 하다. 후배들이 아프다고 할 때도 나는 대뜸 “왜 아픈척 하냐”고 묻는다. 아픈게 사실이라해도 소용없다. 내가 할 말은 “그 정도 아픈것도 못 참으면서 스턴트를 한다고 여기에 있냐”는 것 뿐이다. 매정해도 할 수 없다. 스턴트맨은 자기 목숨을 걸고 돈을 버는 프로다. 프로는 자기가 돈을 받는만큼 값을 할 줄 알아야한다. 물론 누구든 아플 수 있고, 후배들이 정말 아팠으리라는 것도 다 안다. 하지만 그런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자체가 싫고, 창피스럽다. 나 자신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고를 당해도 현장에선 끝까지 “괜찮다”며 인사까지 한 뒤, 혼자 차에 올라서야 반 실신상태로 병원에 가곤 했다. 그렇게 독하지 않으면 이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한국 액션영화에 밴 스턴트맨들의 땀

나는 무술감독이다. 올해 나이 서른 셋, 얼굴은 몰라도 정두홍이란 내 이름 석자만큼은 최근 심심찮게 영화, 방송가에 알려지고 있는 11년차 스턴트맨이자 무술감독이다. 즉 영화나 드라마중 어딘가에 떨어지거나, 부딪히는 장면 혹은 격렬한 싸움 등이 있을 때 이름없이 등장하는 대역배우가 바로 우리다. 나는 그중에서도 다른 스턴트맨의 액션연기를 지도하거나 혹은 내 자신이 직접 출연하기도 하는 총지휘자다. 태권도 4단, 합기도 5단, 격투기, 유도, 킥복싱, 검도, 복싱 등등. 무술이라는 무술은 웬만큼 다 할 줄 안다. 그동안 출연한 작품도 많다. 최근 국내 영화계에 신기록을 세운 블록버스터 ‘쉬리’를 비롯해 ‘태양은 없다’ ‘비트’ ‘런어웨이’ 등 웬만한 한국액션영화와 방송드라마속에는 나와 우리 스턴트맨들의 땀이 배어있다.

예전보다는 좀 인식이 나아졌다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내 직업을 밝히기가 편치 않다. 아직도 스턴트맨이란 직업이 얼마나 천시되고 있는가 내가슴엔 한처럼 맺혀있다. 사실 직업이라고 내세우기엔 이만큼 위험천만한 직업도 없을 것이다. 내 몸만 해도 어디 한 군데 성한데가 없다. 쇄골은 일찌감치 부러져, 지금도 쇳대로 간신히 이어놓은 상태다. 영화 ‘본투킬’촬영중 당한 부상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장면인데 그날따라 비가 내려 내가 덮어쓰고 있던 헬멧에 갑자기 습기가 차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전방에는 정우성의 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자칫하다간 사람들을 칠 것같았다. 순간 가속 50㎞주행중 나는 내 손으로 오토바이를 뒤집었다. 쓰러지면서 크게 다치겠다는 걸 직감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겨우 몸을 일으키는데 어깨에서 뿌드득 소리가 났다. 뼈가 부러져있었다. 그 경황에도 감독한테 연신 “괜찮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주변에 앉아 담배까지 한 대 피며 오기를 부리다 결국 병원에 실려갔다.

뭔가 맞서 싸우고 싶은 치열한 욕망

폐가 터진 적도 있다. 이 일을 시작한 초창기, MBC TV의 ‘일요일 일요일밤에’녹화중 원효대교에서 한강으로 뛰어내리는 장면이었다. 시간상 채 2초도 걸리지 않는 잠깐의 일. 그런데 뭐가 잘못 됐는지 물위로 떨어지자마자 숨이 콱 막혔다. 입으로는 피가 벌컥벌컥 쏟아져나왔다. 마침 보트 한 대가 다가와 가까스로 살아났다. 보라매병원 응급실에 나흘동안 누워있었다. 의사는 까딱하면 죽을뻔 했다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폐활량이 눈에 띄게 떨어진 것도 이 때의 일때문이다. 척추옆 허리뼈도 영화 ‘꼭지딴’때 두 대나 부러졌고, ‘비트’에선 지하주차장안에서 오토바이로 나는 장면을 찍다가 천장의 쇠파이프에 정면으로 머리를 박고 떨어져 실려가기도 했다. 붓고 터지는건 예사, 얼마전 다친 치아는 아직도 치료중이고, 눈 역시 발에 차여 길게 찢어진 흔적이 있다. 팔목과 발목을 부러뜨린 얘기는 너무 많아서 일일이 기억하지 못할 정도다. 한 한의사는 “당신이 지금껏 살아온것도 용하다”고 했다.

집안엔 병원에서 받아 온 약봉지 천지. 서른셋이란 나이도 무색하게 나는 너무도 내 몸을 혹사하며 살아왔다. 그 후유증으로 지금도 솔직히 몸을 움직이기가 쉽지 않다. 역기 하나 드는데도 온갖 통증이 수반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운동을 놓지 않는건 그나마 이렇게라도 움직이지 않으면 정말 완전 재생불가의 몸이 될 까 겁나서다.

왜 그렇게 다쳐가면서까지 굳이 이 일을 하느냐고 사람들은 묻는다. 굳이 대답을 한다면 뭔가 맞서 싸우고 싶은 치열한 무엇, 어떤 도전욕을 채워주기 때문이다. 그 도전의 대상? 바로 나 자신이다. 내 자신에 대한 이상한 오기같은게 있다. 또한 이 스턴트의 세계를 우습게 아는 사람들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제발 우리의 일을 하나의 당당한 직업으로 인정해달라는 울부짖음 같은거다. 그래서 현장에서 더 열심히 했다. 일 자체의 쾌감도 물론 있다. 그것 역시 내 자신과의 문제다. 그냥 빌딩을 보면 나도 인간인지라 솔직히 겁나고 떨리며 두렵다. 하지만 “너 뛰어!” 단 한마디 감독의 큐만 떨어지면 180도 상황이 달라진다. 무조건 뛰어야된다는 생각뿐 아무 생각도 더 떠오르지 않는다. 무섭고 겁나는건 뒷 일이다. 오로지 ‘내가 해 내느냐, 못 해내느냐’ 하는 싸움이다. 사실 나라고 왜 두려움이 없겠는가. 나도 촬영전엔 내내 밤새 가위에 눌리고 식은땀을 흘리며 두려운 시간을 보낸다. 한동안 함께 살던 친누님은 매일 아침 내가 집을 나설 때마다 행여 그날 밤 ‘못 돌아오는 건’ 아닌가 내내 불안에 떨었다. 2년전 겨울엔 직접 죽음을 목격하기도 했다. 강물에 뛰어드는 장면이었는데, 뛰어든지 12분만에 결국 시신으로 떠올랐다. 나 역시 죽음이 두렵다. 그렇게 내 자신이 약한 것을 잘 알기에 더 오기를 부리고, 더 독하게 나를 내몰아왔을 뿐이다. 기어코 내 자신을 정복하고야 말겠다는 오기로 오늘까지 버텨왔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최연소 무술감독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도 그런 오기와 독종같은 성깔때문이다. 그렇지않다면 10~20년씩 스턴트를 한 기라성같은 선배들에다 ‘방방 뜨는’ 후배들도 두고 어떻게 내가 빨리 성장했겠는가.

액션 배우가 아니라 얼굴없는 스턴트맨에 실망

나는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인천체육전문대학 무도과를 졸업하고 군대에 갈 무렵엔 프랑스 외인부대 용병이 되고 싶었다. 군인으로서 자신을 팔 수 있다는 것, 명령에 의해서 철저히 움직이는 용병이 좋아보였다.

그러나 홀로 계신 노모때문에 포기했다. 한때는 합기단 대표선수이자 시범단으로 2년간 외국만 돌아다녔다. 그리고 80년대 당시 한 야당 국회의원의 경호원 노릇도 두어달해보았다. 그게 스턴트외 경험의 전부다. 89년, 아는 선배 한 사람이 “액션배우가 돼 보지 않겠냐”고 해서 나선것이 이 일이었다. 하지만 현장에 가보니 그건 액션배우가 아니라 얼굴 없는 스턴트맨이었다. 처음부터 대역배우라는 걸 알았다면 이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것이다.

첫 장면부터 얻어맞고 쓰러지는 역이었다. 항상 운동으로 단련돼있던 몸이라 대수롭잖게 생각했지만, 상황은 전혀 딴판이었다. 영화의 생리를 모르는 터라, 내뻗는 동작 하나하나마다 창피만 당했다. 결국 한달동안 다른 배우들 가방만 들고 다니는 신세가 됐다. 그러면서 몰래 ‘이를 갈았다’. 기어코 지난 날의 수모를 만회해보리란 생각으로 다른 배우들의 동작을 열심히 보고 또 보았다. 그 영화가 끝난뒤 2~3개월동안은 전혀 충무로에 나가지 않았다. 대신 하루 세시간씩 자면서 혼자 열심히 운동만 했다. 지난 촬영때 보았던 다른 사람들의 동작, 움직임, 요령 등을 끊임없이 떠올리면서 맹연습을 했다. 다행히 두어달 뒤 ‘장군의 아들’팀에서 연락이 왔다. 그 사이 남몰래 갈고 닦은 솜씨를 결국 그 ‘장군의 아들’에서 터뜨렸다. 땀은 언제나 정직한 법이다. 이일재 대역을 맡아 술집에서 일본 야쿠자 대표랑 1대 1로 싸우는 장면에서 인정을 받으면서 나는 확실히 내 이름 석자를 각인시켜놓았다. 그 뒤 많은 영화를 만나게 됐고 결국 모든 스턴트맨들의 바람인 무술감독 자리에 비교적 일찍 데뷔하는 행운도 얻어냈다.

수입 대부분이 병원비로 빠져나가는 생활

그러나 경제적 득실을 따지자면 크게 남은것도 없다. 나는 지금 거지다. 한때 연봉으로 치면 억대가 넘던 전성기도 있었다. 그러나 그 많은 수입중 병원 치료비도 솔솔치 않게 빠져나갔고, 그렇게 ‘몸을 팔아서’ 번 돈으로 겨우 장만했던 천안의 38평짜리 아파트는 몇해전 가까운 사람의 보증을 섰다가 그

마저 날리고 말았다. 그래도 미련이 없다. 내가 가장 아끼는건 자존심과 배짱뿐이다. 나는 대체로 ‘무조건 저지르고 보는’ 스타일이다. 당장 주머니에 든 돈이 500만원뿐이라도 5,000만원짜리 집이 마음에 들면 일단 50만원으로 덜컥 계약부터 해버리는 식이다. 내 철학으론 이렇게라도 해야 원하는 목표 10개중 최소한 3개는 건진다는 생각이다. 감당할 방법은 늘 그 뒤에 찾는다. 돌이켜보면 어떤 경우든 그럭저럭 해결할 방법은 나왔던 것 같다. 너무 사리고 조심하느라 아예 포기하느니보다 나는 이 편이 좋다. 어쨌든 모든 일의 책임은 결국 그 스스로 져야되는 거니까.

독불장군처럼 살아서 그런지 욕도 많이 먹는다. 내 페이(급여)를 깎으려고 하는 사람에겐 ‘일단 현장에서 일하는 걸 보고 판단하라’고 할 뿐, 나는 돈 문제에서도 ‘흥정가능한’ 사람이 아니다. 또하나 듣기 싫은 소리는 내 가정에 관한 것이다. 몇해전 싱가포르의 톱스타를 아내로 맞으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자, 그 뒤 주변에선 ‘마누라 잘 만나서 스타됐다’는 치사한 소리까지 던지고 있다. 정말이지 남자로서 들을 소리가 아니다. 이 때문에 우리 가정 얘기는 더 이상 하기가 싫다. 누가 묻든 양해를 구해야겠다.

다국적 액션영화제작 프로젝트 추진중

이렇게 자존심만 지키다가 혹 나중엔 고립돼 버리는 건 아닐까? 나도 그 생

각을 안 해본게 아니다. 그래서 그 뒷대책으로 생각한게 제작자가 되겠다는 것이다. 앞으로 내 인생이 비참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일이다. 지난 4월에는 직접 미국 할리우드의 스턴트학교도 돌아봤고, 그 때의 인연을 계기로 얼마전부터는 한국, 일본, 스웨덴 등지의 대표들을 모아 다국적 액션영화제작 프로젝트도 추진중이다. 현재 구체적인 작업현안까지 얘기되고 있다. 젊어서부터 꿈꿔왔던 진짜 액션배우로 당당히 데뷔할 날이 멀지 않았다. 또한 나처럼 이름없이 ‘대리전쟁’만 치르고 있는 다른 모든 스턴트맨들에게도 좋은 무대가 될 것이다. 올해는 동국대 연극영화과 입학이라는 목표도 하나 더 있다. 그것까지 이뤄지면 99년 목표량은 완전달성이다. 그러나 오늘이 아무리 만족스러운들, 나는 내 자리가 흔들린다 싶으면 언제든 이 자리에서 떠날 각오가 돼 있다. 실력이 아니라 말로 나를 인정해달라며 부탁해야 하는 그런 구차한 삶은 싫다. 살아가는 끝까지 프로로서의 모습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것. 내겐 그것이 중요하다.

정영주·자유기고가 김명원·사진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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