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 부·사회적 지위 상징… 동양적 체면 문화도 한몫

우리가 흔히 ‘명품’(名品)이라고 부르는 것은 영어로 ‘럭셔리 브랜드’(luxury brand)다. 한마디로 사치품이라는 뜻이다. 명품은 한 세기 전만 하더라도 유럽의 부유한 상류층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들어 명품은 대중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신흥시장 국가를 중심으로 전 세계적인 경제발전이 이뤄지면서 주머니가 두둑해진 일반인들도 명품 한두 가지쯤은 걸치고 다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현재 세계 명품시장은 약 800억 달러 규모로 추산된다. 주목할 것은 아시아 명품시장의 규모가 그 중 37%나 차지한다는 점이다. 루이뷔통, 에르메스, 구찌, 까르띠에, 불가리 등 일류 명품 브랜드는 전체 매출의 50~60%를 아시아 소비자들에게서 거둬들이고 있을 정도다. 이미 아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명품시장으로 자리잡았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그렇다면 과거 유럽의 귀족이나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명품이 어떻게 해서 아시아인들의 생활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 수 있었을까. 또 아시아인들은 어찌 해서 명품이라면 사족을 못 쓰게 된 것일까.

홍콩 등에 거점을 두고 활동 중인 아시아 유통시장 전문가인 라다 차다, 폴 허즈번드 두 사람은 공동으로 펴낸 최초의 아시아 명품시장 실태보고서 ‘럭스플로전’(Luxplosion)에서 그 물음에 대해 날카롭고 생생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아시아의 명품소비 열풍은 우선 급속한 경제성장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서양 국가들이 한두 세기에 걸쳐 점진적인 경제발전을 이룬 반면 아시아의 주요 국가들은 불과 수십 년 만에 선진국과 어깨를 겨룰 만한 고도성장을 달성했다.

경제성장이 매우 빨랐다는 것은 단순히 속도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서양 사회는 서서히 부를 쌓아가면서 그에 걸맞은 소비규범을 함께 만들었지만, 아시아 국가들은 단기간에 부자가 되면서 합리적인 소비규범의 부재 상태를 한동안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 보니 이들 국가의 많은 부자들은 말 그대로 ‘개념 없는 소비’에 빠져들었고, 세계의 명품 브랜드들은 그 틈을 파고들어 새로운 소비기준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시아인들의 특질도 명품 열풍과 직접적으로 결부돼 있다. 서양 사람들이 개인적인 차이점을 존중하는 반면 아시아 사람들은 집단의 규범과 기준에 맞춰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즉 명품 브랜드가 사회적 트렌드가 된다면 아시아 사람들은 기꺼이 거기에 따른다는 것이다.

특히 명품이 경제적 부와 사회적 지위의 상징으로 통하는 상황에서는 어느 누구도 명품 소유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유교적 관념이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동양 특유의 ‘체면’ 문화는 이를 뒷받침한다.

아시아에서 가장 명품소비가 활발한 나라는 일본이다. 일본은 아시아 명품시장의 62%를 차지할 만큼 명품소비 대국이다. 그 중에서도 루이뷔통은 일본 소비자들을 ‘포로’로 만들어버릴 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도쿄에 사는 20대 여성의 경우, 무려 94%가 루이뷔통 제품을 소지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루이뷔통의 전체 매출에서 일본시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88%에 달하고 있다. 일본 소비자들이 루이뷔통의 최대 곳간 노릇을 톡톡히 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밖에도 일본인의 주머니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이 전체 매출의 40%를 넘는 명품 브랜드는 상당수에 이른다.

일본에 이어 아시아 2위의 명품시장은 홍콩으로 35억 달러 규모에 이른다. 홍콩 명품시장이 본격적으로 커진 것은 홍콩이 국제 비즈니스의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경제가 번성하기 시작한 1970년대부터다. 관광과 쇼핑의 천국답게 명품 브랜드 매장 숫자도 뉴욕, 파리, 런던, 밀라노 같은 세계 주요 도시보다 오히려 더 많다.

■ 한국, 일본·홍콩 이어 아시아 3위 명품시장

최근 수 년 동안 젊은 층을 중심으로 명품소비가 급팽창한 한국은 아시아 3위의 명품시장이다. 그 비중도 10%에 육박하고 있다. 한국의 명품시장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의류, 신발, 가방 등에 대해 수입을 자유화한 1987년 무렵이다.

여기에 해외여행 자율화 조치가 더해지면서 한국인들의 해외 명품 열병은 급속히 번져나갔다. 시장개방 이후 불과 10년의 세월이 지난 1990년대 후반, 한국은 본격적인 명품소비 사회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특히 외환위기 직후 신용카드 남발이 명품시장 성장을 북돋웠다는 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때 한국 사회에서는 명품소비를 과소비로 규정하고 비판하는 분위기가 팽배했었다. 지금도 그런 시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예전의 저항감이 크게 옅어진 것 또한 사실이다. 오히려 명품이 대중화되면서 일부 계층에서는 명품을 갖지 못한 것이 열등감을 낳는 원인마저 되고 있다. 그 결과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 중에는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아낀 돈으로 명품을 구입하거나, 술집에서 일하면서 번 돈으로 몸을 치장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게 됐다.

유독 외모에 집착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성형 신드롬과 마찬가지로 명품소비도 하나의 사회적 증후군이다. 얼굴과 몸에 칼을 대는 것이나 고급스럽고 화려한 옷으로 치장하는 것이나,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의 표출이라는 점에서는 똑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친디아’로 불리는 신흥 경제대국 중국과 인도의 급속한 명품소비 증가세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특히 중국 명품시장 규모는 이미 한국과 비슷한 수준으로 커졌으며, 부자들의 증가와 맞물려 멀지 않아 한국을 추월할 것으로 전망된다.

아시아에 불어 닥친 명품 열병의 원인을 아시아 소비자들의 특성에서만 찾는 것은 다소 불공평한 노릇이다. 그 이면에 숨어 있는 명품 브랜드 기업의 시장확대 전략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유럽 명품 기업들은 1990년대부터 큰 변화를 시도해 왔다. 일부 소수의 최상류층 고객만을 고집하지 않고 대중화를 통한 ‘파이 키우기’에 나선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세계 각국에 매장을 늘리는가 하면 새롭고 젊은 고객층을 노려 전통적인 브랜드 이미지를 바꾸는 시도도 했다.

특히 주목할 것은 명품 기업들이 고유의 영역을 벗어나 매우 다양한 제품 라인업을 갖춰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프라다가 비키니와 슬리퍼를 출시한다든지, 샤넬이 스키웨어를 판매하는 식이다. 루이뷔통은 애초 여행용 가방 브랜드로 시작해 핸드백과 지갑, 구두, 의류, 보석 및 시계에 이르기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세계 명품 기업들의 시장확대 전략이 고도화될수록 소비자들은 점점 더 명품의 유혹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명품 기업들을 탓할 수는 없다. 명품을 소비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들의 본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복을 통해 타인 앞에서 한눈에 자신의 경제수준을 드러내 보일 수 있기 때문에 값비싼 의복은 그만큼 값어치를 하는 것이다.” 베블런이 1899년 출간한 저서 ‘유한계급론’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