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산 대형 뮤지컬 · 번역극 대세 속 '루나틱' 등 히트작 대열에 합류

국내 창작극의 소리없는 혁명이 일고 있다. 외국산 대형 유명 뮤지컬 또는 번역극들이 대세를 이룬 국내 연극계로서는 작지만 강한 창작계의 힘과 저력을 입증하는 청신호다. 창작극은 주로 대학로 등 소극장가 일대에서 상연, 저예산과 소인원 등 극히 소박한 소규모 무대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대중성을 획득, 관객들의 발길을 사로잡고 있다. 세계의 공연작으로 이름을 떨친 <난타>와 <점프>의 신화에 이어 적지않은 수의 창작극들이 히트작 대열에 들어서고 있다.

한 여름밤의 꿈(왼쪽), 오! 당신이 잠든 사이(가운데), 위대한 캣츠비(오른쪽)

4년전 대학로의 작은 무대에서 출발해 최근 대극장 세종문화회관에까지 입성하는 ‘괴력’을 보인 <루나틱>은 물론, 수년째 연장 공연으로 장수하고 있는 <오! 당신이 잠든 사이>,<위대한 캣츠비>,<드로잉 쇼>,<닥터 이라부> 등이 갈수록 주목받고 있다. 아예 세계 공연시장을 겨냥, 상품화에 성공한 창작극들도 점차 늘고 있다. 극단 초인은 거의 매년 영국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 출전, 호평을 받으며 세계 각국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잘 알려진 케이스 중 하나. 꾸준히 완성도높은 창작극을 선보이는 극단 ‘여행자’의 행보도 마찬가지다. 창작극의 열기가 국내외를 서서히 달구며 롱런 히트를 치고 있다.

국내 창작극은 질뿐만 아니라 양적으로도 급속한 팽창 단계를 맞고 있다. 최근 실시된 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2008년 6월 현재 대학로 문화지구에만 공연장 109개관이 운영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3년전인 2005년 단 57개관이었던 것에 비하면 약 2배에 가까운 급증세다. 그중 개인이 설립한 공연장이 42.5%, 기업이 설립한 공연장이 24.9%, 건물주가 직접설립한 것이 11.0%를 차지했다.

한국연극협회 김종선 사무차장은 “지난 10년간의 흐름을 비춰본다면 국내 창작계의 작품성이나 대중성 등 질적인 발전뿐 아니라 양적으로도 많이 향상된 것이 사실”이라며 “외국 수입작이나 번역극 못지않게 국내 연극인들의 재능과 창의성, 잠재력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어 상당히 고무적인 현상”이라 말했다. 덧붙여 “과거 90년대를 국내 창작공연계의 과도기라 불렀지만 지금이야말로 진정한 과도기를 맞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국내 창작공연계의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제작환경은 여전히 열악한 것으로 나타나 이같은 성과는 더욱 그 의미가 크다. 창작계의 특징상 주로 소극장, 소규모 극단에서 제작되는 것이 보통. 넉넉지않은 자체 재정으로 제작비를 충당하는 과정에서 연극인들의 어려움이 가중된다. 최근 조사에 의하면 2008년 현재 최소 62개 극단, 14개 이상의 기획사가 운영되고 있다. 이 가운데 배우의 활동기간은 10년 이상인 경우가 46.6%, 5년 이상이 28.4%인 것으로 나타났다.

배우의 수입은 월 100만원 이하가 87.5%를 차지, 압도적인 수를 차지했다. 월 100만원 이상 수입자는 12.5%에 불과했다. 한 연극인은 “불과 3년전쯤 연극계관련 실태조사에 참여했었는데, 당시 국내 창작계에서 꽤 지명도가 높던 연출자와 함께 일하고 있던 조연출자가 설문조사의 ‘희망급여’ 항목에 적어낸 액수가 30만원이었다.”며 “그 정도로 지명도 있는 연출가의 현실이 그 정도라면 그렇지못한 무명의 연극인들의 현실은 얼마나 더 힘겨운지 짐작할만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공적인 지원제도도 국내 창작공연계의 근본적인 재정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인 것으로 지적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따르면 올해 기금이자 204억원, 복권기금 198억원, 적립금 잠식 401억원 등 약 832억원이 창작지원에 쓰일 예정이다.

그러나 2004년 문예진흥기금 모금이 폐지된 이래 기존 적립금과 복권기금으로 운영된 이후 복권판매 부진 등으로 약 1,500억원의 기금이 잠식돼 10년뒤에는 고갈될 위기에 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창작지원기금의 지원방식 또한 종전 ‘소액다건’ 지원 방식에서 최근 ‘소건다액’형 집중지원 등의 방침으로 전환돼 사실상 창작인들이 공적 지원에 의지할 수 있는 범위나 기회가 더욱 좁아졌다.

이제까지의 경우, 지원을 받는다하더라도 실제의 전체 제작예산에 비해 지원액수는 극히 소액. 제작을 진행하기에도, 포기하기에도 애매한 상황이 벌어진다. 한 관계자는 “11,12월 등 연말에 소극장 공연이 한꺼번에 봇물처럼 쏟아지는 것도 그 이유때문”이라며 “일단 지원을 받게되면 차후에 사정상 이를 반납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다. 재정문제로 차라리 제작을 포기하고 지원금을 반납할 경우 향후 2년간 지원을 받을 수 없게되는 제약 때문에 할 수 없이 미루고 미루다 결국 연말쯤 부랴부랴 어떻게든 공연을 만들어올리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이 틈에도 지원제도를 고의로 악용하는 사례도 있다. 지원금을 받기위해 서류상으로는 그럴듯한 기획서를 제출, 일단 지원액을 받고나면 소액범위 안에서 대략 형식적인 저급의 공연을 며칠간 무대에 올리고 빠지는 케이스다. 고의적인 단명작이 전체 공연계를 흐트러뜨리는 것이다.

특히 올해에는 국가예산 10% 절약운동이 전개되면서 정부의 지원금도 약 10% 삭감될 상황. 창작계의 재정상 사기도 한풀 꺾여있다. 김종선 사무차장은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그것이 무대에 올려진 뒤 어느정도 입소문이 나서 관객들이 몰려들때까지는 이에 버티기위한 최소한 몇 달간의 기간과 비용이 필요한데, 그 몇 달을 버틸만한 자금력이 없어서 결국 제대로 피기도 전에 지는 작품들이 많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는 인재 발굴과 육성 차원에서도 악재로 연결된다. 재정이 열악하다보니 소규모 창작팀의 경우, 이를 전적으로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개중 실력있는 연출가나 배우 또는 극본만 ‘빼내어’가는 대형기획사 등의 일방적 스카웃 전쟁도 벌어진다. 이로인해 ‘알짜’만 빼앗긴 채 작품을 포기하고 주저앉는 극단의 붕괴현상도 발생한다.

불안정한 수입과 제작환경에 따라 결국 인력의 잦은 이직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장기간 안정된 자리에 머물며 꾸준한 훈련과 경험을 통해 노하우를 축적할 수 있는 환경이 현재로선 거의 불가능, 전문가 양성면에서 적지않은 손실이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 등 인기작과 무명 참패의 양극화가 더욱 심화되는 가운데, 여간한 능력없이는 ‘극단’이 사라지고 ‘개인’만이 살아남는 상황도 극단화된다. 실제로 서울 소재 극단 수십개중 1년에 단 한 작품도 공연하지 못하는 유명무실한 극단들이 상당수에 이른다.

홍보나 마케팅 능력은 커녕, 자가발전을 위한 연구기반 또한 취약한 것도 약점이다. 현재 국내 공연계, 특히 소극장이나 정극을 다루는 극단의 경우 돈이 없어 간단한 기자간담회조차 엄두를 내지못하는 빈한한 극단들이 다수에 이른다.

관객들의 성향을 파악, 연구분석하고자해도 별도의 리서치조차 재정상 불가능. 이를 극복하기위한 방안으로 한국연극협회에서는 수년내에 여러 기업으로 흩어져있는 마케팅 및 티켓판매 대행기업들의 수집자료들을 공유하며 활용할 수 있는 통합마케팅시스템을 추진, 구축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정확한 데이터를 통해 관객들의 취향과 선호도, 보완점 등을 반영, 공연 제작에 효율적으로 사용할 목적이다.

최근 현저하게 발전한 홍보 및 마케팅업계의 활황과 영향력도 국내 창작공연계에 긍정과 부정, 양면의 날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국내 창작극 대작의 경우 작품성에 비해 과다한 거품홍보 즉 과대광고로 흥행수익을 올린 경우, 그 불똥이 타 창작극에까지 미칠 수 있다. 즉, ‘국산 창작공연은 재미없다‘는 인식을 각인, 공들여 만든 좋은 작품들까지 관객들이 선입견으로 도외시하게하는 부작용을 가져온다. 연극계 관계자는 “작품성에 비해 과다하게 비싼 관람료를 책정하고 과대광고해 창작극에 대한 관심이나 인식을 왜곡시키는 홍보 및 마케팅사의 ‘장난’만이라도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이 모든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결국 창작공연의 흥망을 쥔 실질적인 주인은 역시 관객들이다. 한국연극협회 김종선 사무차장은 “오히려 이같은 현실에서 관의 지원금에 의존하는 것은 극단 자신의 자립도를 해치는 길이며, 스스로 작품성 또는 대중성을 키워 관객들 스스로 극장으로 들어오게 하는 정면승부 정신이 극단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한 “우리 창작인들 역시 종전처럼 앉아서 관객을 기다리기보다는 먼저 현실 어디에서나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창작극을 접함으로써 호감을 높이고 스스로 공연장을 찾을 수 있도록 관객과의 접근성을 높이는 데에 적극 노력할 것”이라며 강한 의지를 밝혔다.


정영주 기자 pinpl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