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개방 이후 자본과 예술 밀월 관계 눈떠… 2003년 베이징 '798'서 본격화

오늘날 세계미술시장에서 장샤오강(張曉剛), 위에민쥔(岳敏君), 팡리쥔(方力鈞) 같은 중국현대미술 작가들이 보여주고 있는 상업적 성공은 개혁개방정책을 시행했던 덩샤오핑(鄧小平) 정책 결실의 일부분으로 여겨진다.

시장경제논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이후 중국은 이제 민족적 자신감으로 치렀던 북경올림픽을 정점으로 민주화와 시장원리의 글로벌리즘과 직접적 대면을 앞두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중국현대미술의 상업화는 더욱 가속화할 전망이다.

중국현대미술의 상업화는 개인의 자유추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2003년 베이징 ‘798’에서 본격화되었다. 행정구역 단위인 베이징 따산쯔(大山子) ‘798’에 뉴욕의 소호처럼 공장지대를 개조한 창작스튜디오가 생기고 자유로운 문화적 분위기가 형성되자 개인 화랑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나아가 개혁개방이후 축적된 부의 과시와 문화적 욕구의 표출이 몇몇 스타작가를 배출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중국현대미술은 실험 작가들에 의한 정치적 반발 또는 자의식의 표출에 한정되었으며, 예술 활동은 지적 비판을 수행하는 행위였지 부를 축척할 수 있는 상업적 행위로 인식되지 않았다.

개혁개방이전 중국미술의 커다란 흐름은 우리가 ‘중국화’라고 부르는 전통적 민족주의형식 이외에 대부분 유화와 판화를 통하여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형식의 예술이다.

그것은 ‘사실적’이었으며, 사회주의의 현실과 이상을 표현하는 예술형식이었다. 1985년 중국의 현대예술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1985년은 미술운동에 있어서 급진적인 문화이념의 탄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전환점이었다.

새로운 미술운동은 전통문화를 부정하면서 그리고 전면적으로 서구 현대미술을 학습하면서 탄생하였으며, 이 미술운동은 서구의 현대적 문화형태를 받아들여 자신의 문화를 자극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숨어있는 고도의 책략이었다.

이 해에 <전진하는 중국청년 미전>이 열렸고, 여기에서 당시 중앙미술학원 2학년 학생이었던 장췬(張群), 멍루딩(孟祿丁)의 작품 <신시대에서-아담과 하와의 계시>가 출품되었다.

이 작품은 ‘전통’의 단절과 새로운 시대의 희망을 표현한 것으로, 전통문화를 상징하는 태극을 깨뜨리고, 금단의 열매를 먹고 깨어난 현대 중국청년의 발아래 유구한 역사의 상징인 용문석굴이 놓여있음을 그리고 있다. ‘전통’의 틀은 깨지고 그 지위를 새로운 사상의 상징인 금단의 열매를 먹은 여신에게 내어준다. 그녀는 1985년 최신 유행의 블루진을 입고 왔다.

1989년에 일어난 천안문사태는 중국현대미술이 정치적 풍자와 현실에 대한 비판을 배경으로 양적 팽창을 거듭하며 사회의 보편적 인식을 획득하여 단숨에 세계무대로 도약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이 시기 홍위병 출신이거나 문화대혁명을 경험한 세대 창신(蒼鑫), 왕칭송(王慶松), 양즈차오(楊志超) 같은 행위예술가들과 까오시엔(高先), 까오치앙(高强), 쉬용(徐勇) 같은 사진작가들은 사회주의체제에 대한 비판과 삶의 본원적 의미에 대한 재고로써 중국현대예술의 정체성을 표출하기 시작한다.

다른 한편으로 쉬빙(徐氷), 황융빙(黃永砯), 푸중앙(傅中望) 같은 예술가들은 ‘신문인화’운동을 기반으로 자신의 예술적 근원을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뤼성중(呂勝中) 역시 전통사상과 민간문화에서 자신의 예술적 기반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중국 베이징 798 예술단지 내 공장을 개조한 전시공간.(위)
베이징의 따산스에서 10분거리에 위치한 왕징의 저우창 예술구는 798예술구가 확장하면서 생진 798의 축소판이다. 중국 베이징 저우창 예술단지내표갤러리입구에전시된작품. 베이징=조영호기자(아래)

그들은 고대 문인의 자유로운 창작정신에서 예술의 참모습을 발견하고자 했다. 이들 신문인화가의 의식은 사회주의체계와 집단생활문화를 이미 벗어나기 시작했으며, 현실주의와 개인적인 가치의식을 중시하였다. 이들은 보편적 예술형식을 부정하며 순수한 개인의 정신적인 자유와 표현을 추구하였다.

이들이 민족적 정체성 속에서 자신의 예술형식을 완성하고자 노력하면서 오늘날 대부분의 중국현대미술에서 나타나는 전위적 ‘중국취향’ 내지는 ‘중국기호’의 방향을 제시하게 되지만, 여전히 중국미술계의 주된 문화전술이 되지는 못했으며 상업적 이용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이처럼 순수한 예술정신의 표현이었던 중국현대미술의 전위적 표현이 상업화의 길을 걷게 된 전환점은 1993년이었다. 1993년 이전 중국 현대예술가들은 비엔날레나 아트페어 같은 대규모의 국제현대미술전람회에 거의 참가해 본적이 없었다.

그들은 서양의 예술제도와 자본의 달콤한 매력을 알지 못했고, 예술창작이 돈이 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1993년 중국예술가들의 국제 비엔날레 참여는 그들에게 자본과 예술의 밀월에 대해 눈 뜨는 계기를 제공하였으며, 그들은 그 제도를 이용하여 문화산업의 첨병이 되었다.

당시 해외에서 활동하던 천전(陳箴), 차이궈치앙(蔡國强), 아시엔(阿仙), 중국 내에서 활동하던 송동(宋冬), 챠오잉치(焦應奇), 치우즈지에(邱志傑), 잔앙(展望) 등의 작가들이 자신의 작업에 중국 전통문화 혹은 도상 같은 상징들을 도입하면서 중국적 특색을 지닌 기호의 이용이 늘어난다.

2002년을 전후로 중국의 현대예술가들은 80년대와 90년대 이룩한 정치적 책략과 중국 특색의 문화적 정체성을 서양 주류문화에 대한 ‘이질적 요소’로써 서구사회에 예술적 새로움을 호소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중국현대 예술가들은 지구화라는 구호 아래 ‘제3세계문화’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동시에 식민주의 문화와 준식민문화의 언어 환경을 받아들여 작품을 제작한다. 그리고 이들에게 물질적 부가 대가로 주어진다. 예술가들은 시장을 겨냥하여 작품을 제작하고, 예술적 가치를 경제적 가치로 교환한다.

그들의 좌판에는 이른바 ‘중국의 지혜’, ‘중국특색’, ‘중국방식’, ‘중국형상’이라는 포장지로 포장된 한자나 서예, 수묵, 찻잎, 족자, 청화자기, 실크, 치파오, 팬더, 명대풍의 가구, 고전적인 중국화나 희곡이나 소설, 화약, 인쇄술, 나침판, 족보, 역사 이야기, 역경, 선종과 노장사상, 또는 문혁시기의 군중형상, 표준사진, 표어, 선전화, 휘장, 중산복, 마오쩌둥(毛澤東) 어록, 군복, 동방홍 경운기, 레이펑(雷峰) 같은 혁명 영웅인물과 마오쩌둥 같은 지도자 초상 같은 상품들이 놓여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품들은 ‘798’이라는 시장에서 날개 돋친 듯 팔린다.

오늘날까지 상업적으로 성공한 중국현대미술은 그들의 전위성을 정치적 속성에 두고 있다. 최근까지 그 위세를 잃지 않고 있는 왕광이(王廣義)의 정치 팝아트만 하더라도, 냉소적인 웃음 속에 체제 비판적 칼날을 숨기고 있다. 어떠한 변신을 하든 중국현대미술의 흐름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전통을 제외하고 논의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그러나 사회는 변하기 마련이고 자본의 형성과 인터넷의 발달과 더불어 이미 중국사회도 개인주의적 색채로 뒤덮이고 있다. 베이징 올림픽의 개최로 한껏 부풀어 오른 민주화의 열망 또한 전체적인 향방을 어떤 방향으로 튀어 나가게 할지 모른다.

개혁개방이후 그 경제적 혜택을 받으며 성장하고 정치적 억압을 몸소 겪지 않은 작가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는 가까운 미래에는 지금까지와 다른 색채의 중국현대미술이 출현하게 될 것이다.


김백균 중앙대학교 한국화학과 교수 baikgyun@ca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