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영의 시사만화 '삽화'서 웹툰까지 남녀노소의 100년친구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는 무료 만화가 연재되고, 어린이들의 교과서와 학습지도 만화를 활용해 어려운 개념을 설명해 준다. 어디서 본 듯한 드라마와 영화는 모두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세상에 만화가 가득해졌다. 세상에 만화가 가득하다. 상전벽해(桑田碧海). 20년 전만 해도 만화는 전형적인 ‘골방’의 매체였다. 만화를 보기 위해서 동네 구석진 곳의 만화방에 가거나, 아니면 잡지나 책을 사서 방으로 들어갔다.

은밀하게 혼자 만화를 즐겼고, 만화는 독자와 일대일 커뮤니케이션을 수행했다. 만화책을 펴는 순간, 남루한 현실은 잊혀지고 모험과 액션, 로맨스에 빠져들었다.

만화는 상상력의 매체다. 만화가는 기술의 힘을 빌지 않고 오로지 인간의 손에 의지해, 인간의 상상에서 나온 꿈을 표현한다. 독자는 칸마다 오롯이 버티고 선 그림을 자신의 상상에 띄워 움직임과 소리를 만들어낸다.

만화를 볼 때마다 평면에 간략하게 그려진 그림들에 생명을 부여하는 창조적 행위를 해야 한다. 피곤하다고? 아니다. 인간은 창조적 행위를 즐기게끔 진화되었다. 게다가 약화된 이미지에 자신이 전달하려는 정보를 담아내는 행위는 ‘문자’가 나오기 이전 인간이 가지고 있던 유일한 전달수단이었다.

인간의 상상력의 호소하는 매체인 만화가 지금 우리가 보는 모습을 갖게 된 것은 대중매체가 등장한 근대에 이르러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시작을 1909년 6월 2일 <대한민보> 창간호에 실린 이도영의 시사만화 ‘삽화’로 본다. 헤아려보니까 벌써 99년, 내년이면 100년이다. 만화는 지난 100년 동안 끊임없이 사회와 관계를 맺으며 대중들을 ‘계몽’하거나 ‘위로’했다.

만화가 지닌 계몽의 힘은 주로 시사만화를 통해 나타났다. 신문에 실린 1컷 혹은 4컷 만화들은 ‘시사(時事)’라는 수식어를 자신의 이름에 붙이며 당대의 현실과 치열한 긴장국면을 만들었다. 시사만화는 기사가 쓰지 못하는 진실을 작은 네모 칸에 담아 숨겨놓았고, 독자들은 그 풍자와 비판을 읽어냈다. 고바우, 두꺼비, 왈순 아지매, 까투리 여사와 같은 주인공들은 소시민의 분노와 슬픔을 칸 안에 담아냈다.

1. '고바우 영감' 김성환 作. 1958. 동아일보
2. '남의 숭내' 이도영 作. 1909. 대한민보
3. '삽화' 이도영 作. 1909. 대한민보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성환은 1958년 1월 23일 <동아일보>에 경무대에서 똥을 치우는 자가 거들먹거리고 오자, 다른 이들이 그에게 “귀하신 몸 행차하시나이까?”라며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 4칸 만화 <고바우 영감>을 그렸다. 흔히 ‘경무대’로 통칭되는 이승만 대통령 측극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풍자하는 만화였다. 김성환은 이 만화를 그렸다는 이유로 즉결심판에 넘어갔다. 7

0년대 유신시절에는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신문사에 상주하며 기사, 사진, 만화 하나 하나를 검열했다. 80년대도 검열의 주최만 바뀌었을 뿐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다. 신군부의 문제, 광주 이야기 등 조금이라도 문제의 여지가 보이는 만화는 검열에 걸려 발표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보도 자체가 불가능했던 시절 시사만화는 작은 진실의 빛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만화가들은 검열관의 눈을 피해 현실을 드러내기 위해 힘겨운 투쟁을 했다. 노골적인 감시, 검열과 삭제, 심지어 협박을 받으면서까지 만화는 계몽과 풍자와 비판의 펜을 놓지 않았다.

1980년대에 접어들며 만화는 민중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대중과의 효과적인 소통방법을 고민하던 민중문화운동진영에서 만화를 발견한 것이다.

1982년 대학생이던 탁영호는 카톨릭농민회의 제안을 받아 농촌문제를 형상화한 <학마을 사람들 이야기>을 발표했다. 이 작품 이후 운동현장에서 만화창작이 활발해 졌고, 여러 단체들은 회보 등에 만화가 수록되기 시작했다.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 1988년 12월의 대선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기 만화는 걸개그림, 판화와 함께 민중미술의 3대 시각매체로 자리 잡을 정도로 창작이 활발해지고, 팜플렛이나 대자보를 통해 다양하게 유통되어졌다. 민중만화가 투쟁의 전면에 나서자 정부의 탄압도 거세어졌다.

1987년 9월 당시 민미협 만화분과 위원장인 손기환은 <만화정신> 2집을 간행한 뒤 국가보안법위반혐의로 구속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최정현은 <반쪽이 만화집>을 제작 중에 경찰에 압수당했다. 1988년 <한겨레신문>이 창간하며 등장한 박재동의 시사만화는 가장 빼어난 풍자의 맛을 독자들에게 보여주었다.

시사만화가 계몽과 풍자를 통해 현실을 드러냈다면, 어린이 잡지에 연재되거나 만화방을 통해 유통된 이야기만화는 웃음과 눈물을 통해 당대의 현실을 드러냈다.

박수동은 밝고 건전한 이야기들만 보고 자랐던 70~80년대의 어린이들에게 가난과 슬픔을 들려주었다. <번데기 야구단>에서는 엄마 혼자 시장에서 좌판을 벌이는 물꽁 이야기가 나오고, <신판 오성과 한음>에서는 육성회비를 잃어버리고 가출한 봉구의 이야기가 나온다.

80년대 만화방 만화에서도 반란이 벌어졌다. 김혜린의 <북해의 별>은 사랑 이야기의 밑에 숨겨놓은 혁명 스토리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허영만의 <오! 한강>은 여러 설이 난무하면서도 만화에서 처음으로 근현대사, 그것도 남북의 이념문제를 전면적으로 드러냈다. 이희재는 <간판스타>, <민들레>, <새벽길> 등 빼어난 단편을 통해 가난한 이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대중만화의 길도 그리 순탄하지는 못했다.

1968년 8월 31일 문화공보부가 산하에 만화가, 언론인, 법조인, 여성단체, 아동문학가 등으로 구성된 한국아동만화윤리위원회를 조직하여 9월 9일부터 원고를 심의하기 시작했다.

당시 윤리위원회는 한국아동만화윤리강령, 한국아동만화실천요강 등을 법으로 제정했는데, 이 법을 통해 만화의 용지와 판형, 편수와 쪽수까지도 포괄적으로 규제하기 시작했다. 이에 의해 1968년 이후 선화지는 갱지로 대체되었고, 국판은 4×6배판으로 확대되었고, 무제한 편수는 상중하 3권으로, 각 권 50페이지는 130쪽 이상으로 규제되기 시작했다.

1979년 4월 불량만화를 팔면 형사처벌이 가능하도록 미성년자 보호법이 개정되었다. ‘만화’는 ‘통제’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기본적 인식은 8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1980년 9월, 한국도서잡지윤리위원회는 ‘만화정화방안’을 발표하며 ‘저질만화 추방’을 정의사회구현의 실천항목으로 내세웠다.

같은 해 11월 만화가협회는 ‘만화인 자율정화대회’를 개최했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사회정화위원회는 불량만화를 출판, 제작한 14명을 구속하고, 만화가 69명을 미성년자 보호법위반으로 고발하기도 했다. 90년대에 들어서며 겨우 숨통이 트였지만, 이현세 <천국의 신화> 사건이나 <스포츠신문> 작가 고발 등과 같이 표현의 자유를 옥죄는 공권력의 시도는 계속되었다.

21세기에 접어들어 인터넷이 새로운 매체로 등장하며 만화는 게릴라전이 가능하게 되었다.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만화를 그려 게시판에 올렸다. 그 내용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만화를 퍼나르기 시작했다. 종이매체에서 볼 수 없었던 파괴력을 갖게 되었다. 2004년 탄핵국면과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에서 만화는 웹을 통해 이전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현실의 이슈에 대해 발언하기 시작했다. 직접적이며 빠르게 만화가 반응했고, 만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호응을 보냈다.

■ 대표작 소개

▲이도영 ‘남의 숭내’ <대한민보> 1909년 6월 2일자

일본식 예복이었던 서양의 연미복을 입고, 지팡이를 들고 이야기하는 사회지도층의 모습을 원숭이로 표현하고 ‘남의 숭내’라는 제목을 달아 비판하고 있는 만화. 이도영은 이처럼 서슴없이 일제의 침략야욕과 권력층의 문제를 만화를 통해 비판했다.

▲김성환 ‘고바의 영감’ <동아일보> 1958년 1월 23일

본문에 언급한 경무대 똥통사건이라 불리는 최초의 만화가 필화사건을 일으켰던 작품. 이승만 정권 당시 만연했던 측근 비리와 권력을 풍자한 만화다. 많은 이들이 이 만화를 보고 통쾌해 했고, 특히 이 만화로 인해 필화사건이 일어나 더 유명해 진 작품.

▲김혜린 <북해의 별> 1983년

남녀간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그린 순정만화였지만, 만화에서 다룬 이야기는 해상국가의 혁명 이야기. 어떻게 민중혁명이 조직화되는가를 그려내 당시 대학생들에게 큰 화제가 되었던 만화. 혁명을 꿈꾸던 80년대, 그 혁명의 꿈을 만화로 실현시켜 준 작품.

▲이희재 <간판스타> 1986년

70~80년대 수출주도형 고도성장이 어떻게 농촌공동체를 해체했는가에 대해, 그리고 시골을 떠난 누이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 짧은 단편이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던 만화.

▲강풀 ‘탄핵반대 만화’ 2004년 3월 14일, 강풀닷컴

인터넷 만화가 강풀은 자신의 홈페이지 강풀 닷컴(www.kangfull.com)에서 탄핵반대 만화를 발표하며, 다른 작가들과 릴레이 만화를 시작했다. 이 탄핵반대만화가 인터넷 상에 퍼지면서 광범위한 여론을 형성했다.

▲강풀 <26년> 2006년 4월 3일~10월 13일, 미디어다음

5.18의 피해자들이 모여 역사의 심판을 거행한다는 이야기. 사실과 허구를 결합한 이야기를 전개시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모았다. 특히 5.18을 모르는 어린 네티즌들에게 다시 한번 당시의 문제를 생각해 보게 했던 만화.


글·박인하(만화평론가, 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