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휴면기 불구 인터넷 타고 전자 정보화 시대 주도

세계문자 체계의 대가인 제프리 샘슨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은 매우 작고 아주 먼 나라이지만, 두 가지 점에서 언어학자에게는 아주 중요한 나라이다. 한국은 13세기에 금속활자 인쇄술을 세계 최초로 발명하였다. 그리고 15세기에 세종대왕이 오늘날 한글이라고 부르는 완전히 독창적이고 매우 훌륭한 음운표기 문자를 창조했다. 많은 학자들이 한글을 ‘세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문자 중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 체계’, 혹은 더 간단히 ‘세계 최상의 알파벳’이라고 부르고 있다.”(재프리 샘슨,<세계의 문자 체계>의 저자)

세계 언어학자들의 한글의 과학성에 대한 찬사는 이제 웬만한 한국인은 한 번쯤 들어본 이야기이다.

그러나 샘슨 박사의 평가는 우리에게 뼈아픈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과거 한국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하고도 구텐베르크만큼 그 기술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던 한계와 무관하지 않다.

또한 세계 최고의 문자인 한글을 발명하고도 500년 동안이나 한글을 활용하지 않았던 무지와도 무관하지 않다. 과거의 한국은 정보 기술에 관한한 거의 본능에 가까운 감각과 재주로 최고의 창의성을 발휘해서 세계 수준의 도구를 발명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자신이 발명한 기술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활용하지 못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 문자의 힘

예일 대학의 헤이블릭 교수는 그리스 알파벳의 출현은 불이나 바퀴의 발명처럼 서양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위대한 도약이었다고 말했다.

중국에서 화약과 나침반을 배워갔던 서양이 동양을 제치고 세계의 기술과학을 주도하는 이유는 서양인이 동양인에 비해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서양인들이 누구나 배우기 쉬운 그리스 알파벳을 발명하고, 그 알파벳을 활용하여 2000년간 지속적으로 많은 사람이 서로 지식과 정보를 공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보다 200년 뒤에 금속활자인쇄술을 발명하고도 서양이 전 세계의 지식과 정보를 주도하게 된 이유도 그들의 문자가 알파벳이었기 때문이다. 알파벳으로 인쇄된 책이 서구 사회 내에서 지식과 정보를 획기적으로 확산시키는 동안, 동양의 한자 인쇄물들은 소수 엘리트들의 정보 독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현재 전 세계 책의 70% 이상이 로마알파벳으로 출판된다. 이런 그리스 로마 알파벳의 가장 큰 힘은 알파벳이 배우기 쉬운 문자라는 점에서 나온다. 디린저 박사의 말처럼 인구의 1% 정도만 활용 가능했던 이집트문자가 귀족엘리트 문자인 반면에, 27개의 음소문자인 알파벳은 누구나 쉽게 배워 정보와 지식을 공유할 수 있는 민주문자였다.

알파벳의 민주성과 금속활자 인쇄술에 의한 대량생산이 결합되었을 때, 그 시너지 효과는 가히 폭발적이었으며, 우리는 이 둘의 결합을 정보혁명이라고 부른다. 샘슨 박사가 한국의 과거를 바라보며 감탄하는 이유는 알파벳의 힘과 활자 인쇄술의 힘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샘슨 박사의 감탄은 뼈아픈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금속활자 인쇄술과 그리스 알파벳을 능가하는 세계 최상의 문자인 한글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이 두 기술을 결합할 안목이 없었던 것이 과거 조선의 한계였으며, 이는 한국사회의 지식과 정보의 공유를 500년 이상 지연시켰다.

그러나 500년의 휴면기를 거치고도 우리는 현재 세상에서 가장 빠르고 광범위한 인터넷 문화를 누리며 전자정보시대를 주도하고 있다. 수백 년 동안 잠자고 있던 한국이 오늘날 전 세계를 상대로 경쟁할 수 있을 만큼 급성장하여 정보력을 가지게 된 이유는 한글이 세계 최고의 문자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한글을 우리의 문자로 채택하고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60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한글이 이루어낸 한국 사회의 발전과 정보 공유의 힘은 그리스알파벳이 2000년간 서구사회에 기여한 역할과 비교할 때 조금도 손색이 없을 만큼 지대한 것이었다. 그리스 알파벳이 서양의 민주문자로 불리듯이, 한글은 동양의 민주문자이다.

오늘의 서구 문명 뒤에 알파벳이 있었던 것처럼, 오늘의 한국 뒤에는 한글이 있었다. 한글은 단 60년 만에 한반도에서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이제 아무도 한국에서 한글을 멈출 수 없다.

그러나 한글의 역할은 거기까지이다. 한글은 그 자체가 어떤 정신이나 가치를 지닌 것이 아니며, 단지 정보 교환을 도와주는 도구일 뿐이다. 앞으로의 한글의 힘은 우리가 한글로 어떤 정보를 주고받으며, 한글로 어떤 정보를 후대에 남기는가에 달려있다.

■ 한글날의 의미

한국어학의 대가인 로스 킹 박사는 세상에서 문자가 창제된 날을 국경일로 정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고 말했다. 남한은 10월9일(한글이 반포된 날), 북한은 1월 15일(한글이 완성되었다고 생각되는 날)에 한글날을 기념하는 것을 두고. 킹 박사는 한글에 대한 집착이 순수주의를 고집하는 문자 민족주의(scrip nationalism)의 표현을 아닌가하고 우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한글날을 기념하는 이유는 애국심이나 민족주의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한글날을 기념하는 이유는 지난 60년간 한글로 이루어낸 한국의 발전을 통해 문자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 한글이 얼마나 실용적인 도구인지를 경험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글의 힘을 바탕으로 21세기 정보 사회에서 이루어낼 세계로의 비약을 희망하기 때문이다.

한글날은 한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오늘 한국의 정보의 공유를 힘을 돌아보며, 민주문자의 중요성을 기억하는 날이다. 한글을 통해 한국인의 창의성과 잠재된 가능성을 확인하며,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세계로 나가는 발판으로 삼는 날이다.

■ 한국일보, 국내 최초로 한글인쇄 기계화

30년 전인 1979년 10월 9일, 533돌 한글날인 이날 한국 언론사는 인쇄문화의 새 장을 열었다. 한국일보 전산팀이 국내 최초로 한글의 기계화 작업을 완성한 것. 한글의 자동문선과 자동사진식자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컴퓨터ㆍ시스템을 개발, 이제까지 문선공이 활자를 하나씩 고르던 원시적 공정에서 탈피해 한글인쇄의 새시대를 개척한 것이다.

한글인쇄의 기계화로 종래 숙련된 문선공이 1시간에 1,000자 정도밖에 뽑을 수 없는 자수를 이의 10배에 달하는 1만자를 처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타를 CRT(음극선관)의 화면(디스플레이)에 직접 교정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인쇄에 드는 시간ㆍ경비를 종전의 10분의1로 줄였다. 또한 컴퓨터에 내장된 프로그램에 따라 글자의 크기를 자유자재로 조절하고 편집까지 마칠 수 있게 됐다.

당시의 개발 총책임자는 장재구 한국일보 LA 지사장(현 한국일보 회장). 장재구 지사장은 70년대 초부터 한글기계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 미국과 일본 등지의 최신 인쇄기술 정보를 입수, 종합분석해 왔으며 한국일보 전산팀은 78년 1월 한글기계화에 본격적으로 착수해 1년 9개월의 각고끝에 한글자동문선 및 자동식자 컴퓨터ㆍ시스템을 개발하였다. 이를 계기로 신문의 가로쓰기, 한글ㆍ한자 겸용 시스템이 가속화되는 등 인쇄와 출판문화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 김미경 교수

대덕대학 교양과 교수, <대한민국 대표브랜드 한글> 저자


김미경 mikim@ddc.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