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대부 임영웅 오태석서 뮤지컬 리더 설도윤 박명성까지

1908년 <은세계>를 시작으로 한국 신연극은 올해 100주년을 맞았다. 이인직이 당시 인기 있었던 <최병두 타령>을 전반부에 차용하고 옥남이 이야기를 첨가해 만든 것이 <은세계>이다.

이 시대 연극, 뮤지컬의 리더를 말하기에 앞서, 100년 사를 함께 이끌어온 이들의 근간을 이해하기 위해 자칫 무리하더라도 간략히 나마 흐름을 살펴보고자 한다.

1910년대가 임성두를 필두로 한 신파극이 처음 소개되어 크게 흥행한 시기라면 3.1운동 이후 20년대에는 민족의식의 확산이 연극계에도 영향을 미쳐 학생극단이 활성화됐으며 동시에 본격적인 근대극이 막을 연 시기이기도 하다.

프롤레타리아 극의 등장과 유치진, 채만식 등의 많은 인재가 등장했던 30년대를 거쳐 해방까지 4,50년대는 연극의 암흑기라 불린다. 그러나 1950년 국립극장이 개관하고 유치진이 초대 국립극장장으로 선임되면서 신협과 극협 두 개의 전속극단을 두었는데, 신협은 전후에도 연극활동을 주도하며 지금까지 명맥을 잇고 있다.

1956년에는 차범석, 최창봉 주축으로 제작극회를 설립하고 현대극의 실험과 소극장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시민사회로 접어든 60년대에는 리얼리즘에서 벗어나 반(反) 사실주의극이 수용되기 시작했다.

이때 실험극장은 이오네스코의 부조리극을 선보였다. 차범석의 대표작 <산불> 또한 이때 초연했으며 연극사의 한 지류로 흘러나온 한국 최초의 창작뮤지컬 <살짜기 옵서예> 역시 이때 공연되었다.

독재정권으로 산업화가 이루어졌던 70년대에는 정부 주도의 공연지원이 펼쳐지며 문화예술진흥원 설립, <서울연극제>로 이어져오고 있는 <대한민국연극제>출범이 있었고 현재 공연문화산업연구소 이사장인 김의경은 1976년 현대극장을 창단, 윤복희를 앞세운 뮤지컬 <빠담빠담빠담>을 올리며 연극의 범주에 대한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80년대 말엔 정치풍자극이 등장하고 90년대 들어서면서 표현의 자유가 본격화되면서 여성주의 연극과 뮤지컬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현재 연극과 뮤지컬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의 활동은 100년의 역사 속에서 고스란히 숨쉬고 있다.

정통연극의 대부라 일컬어지는 극단 산울림의 임영웅 대표는 산울림 극단을 창단하기 이전에 ‘신협’을 통해 공연을 올리기도 했고 90년대 여성주의 연극에 흐름을 형성했으며 극단 실험극장은 한국뮤지컬협회장인 윤호진이 90년대에 대표를 맡기도 했다.

뮤지컬의 대중화에 힘을 실었던 현대극장은 당시 현대아카데미를 운영했는데, 그곳은 현재 뮤지컬계의 리더인 설도윤과 박명성이 뮤지컬의 기초체력을 닦았던 곳이기도 하다.

역사화 함께 걸어온 이들 중 여전히 연극계의 리더로 꼽히는 이들은 임영웅외에 이윤택, 오태석, 손진책이 꼽히며 배우 중에는 박정자, 윤석화, 유인촌 등이다.

앞의 4인이 연출과 극작, 후학양성 등 연극 자체에 힘을 쏟아온 이들이라면, 뒤의 3인은 배우에서 시작해 다양한 사회활동까지 더하며 연극계의 목소리를 널리 알려왔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뿌리를 가지고 있지만 연출가, 제작자, 프로듀서로 뮤지컬이 하나의 문화산업으로 자리잡는데 기여한 윤호진, 송승환, 설도윤, 박명성는 자타가 공인하는 뮤지컬계의 리더들이다.

4- 임영웅, 5- 설도윤, 6- 윤호진

1969년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출해 한국 초연한 임영웅은 1970년 극단 산울림 창단 이후 ‘연극학교’로 불리며 수많은 연출가와 배우를 배출해냈다.

연극의 침체기에는 <위기의 여자>, <딸에게 보내는 편지> 등 여성연극을 통해 여성관객을 소극장으로 끌어들였고 그가 연출한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최근 한국과 아일랜드 수교 25주년을 맞아 베케트 극장에서 프랑스, 더블린, 폴란드, 일본에 이어 공연된다. 한국 신연극 100주년을 맞아 그 ‘연극학교’라는 별칭에 걸맞게 ‘연극 연출가 대행진’ 프로젝트를 기획했는데, 이는 지난해 이성열, 김광보 등의 젊은 연출가들과의 공동작업으로 연극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던 ‘따로 또 함께’의 후속 프로젝트라 볼 수 있다.

연극인들이 국내 최고의 연출가로 꼽는 오태석은 1967년 극작가로 등단해 극단 목화 대표로 모더니즘, 한국 전통의 감성 등 다양한 연극적 실험을 계속해오고 있다. <태> <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 <테러리스트 햄릿> 등을 통해 한국 연극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국립극장 예술감독으로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그는 최근 전통연희에 도전하는 등 30여년 전 모습 그대로 여전한 현역이다. ‘문화게릴라’로 더 유명했던 이윤택은 연희단 거리패를 이끌며 우리의 전통 연희에 무게를 싣고 공연해왔다. 2004-2005년 국립극단 예술감독을 지내고 현재 서울예술단을 이끌고 있는 그는 지난해 동국대 연극학과의 부교수로 임용되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극단 미추의 대표로 꾸준히 마당놀이를 독자적인 공연양식의 하나로 완성시킨 손진책은 연극사 100년을 맞아 <남사당의 하늘>과 <은세계>를 연출했으며 17대 대통령 취임식 총연출, 양주별산대놀이마당 등 왕성한 활동을 해오고 있다.

1966년 극단 자유의 창단멤버로, 배우생활을 시작한 연극계의 대모 박정자는 현재 소외된 계층과 지역을 찾아 문화예술을 전파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화나눔추진단 단장으로, 연극인 복지재단 이사장으로 발을 넓혔다.

올해에는 연극계의 살아있는 전설인 백성희 장민호 선생에 이어 세 번째로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배우에서 월간객석 대표,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 극장장, <토요일 밤의 열기> <사춘기> 등의 뮤지컬 제작자로 영역을 넓혀온 윤석화는 내년 봄쯤 <신의 아그네스>로 활동을 재개할 예정이다.

역시 배우로 커리어를 쌓아오던 유인촌은 극단 유씨어터, 서울문화재단 대표를 거쳐 올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임명되며 공연계에서 막강한 파워를 쥐었다.

극단 실험극장에 1970년 입단하며 연극 연출을 시작한 에이콤의 윤호진 대표는 한국 연극연출가 협회장, 현재 한국뮤지컬협회장 등 연극과 뮤지컬을 두루 섭렵했다. 뮤지컬 <명성황후>로 대형창작뮤지컬의 가능성을 가늠하고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뉴욕 공연시장에 출사표를 내던졌다.

그가 뮤지컬의 기반을 닦았다면 PMC의 대표 송승환은 <난타>의 성공적인 해외 진출로 해외시장에서 한국 공연의 무한한 성장 가능성을 확인 시켜준 인물이다.

설앤컴퍼니의 설도윤 대표는 뮤지컬을 산업으로 인식하고 2002년 <오페라의 유령>을 국내 장기공연을 실현하며 한국의 뮤지컬 시장을 세계 4번째로 큰 시장으로 성장케 한 장본인이다. 뮤지컬 제작과 함께 현재는 공연계의 전문인력을 배출하고 있으며, <오페라의 유령>의 호주 공연으로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해외 크리에이티브 팀이 참여하는 새로운 형태의 창작뮤지컬 <천국의 눈물>을 제작하고 있다.

국내에서 공연된 굵직한 해외 뮤지컬의 라이선스를 보유하고 있는 신시뮤지컬의 박명성 대표. 설도윤 대표가 뮤지컬 시장의 확대라는 과업을 달성했다면 박명성 대표는 <맘마미아> <아이다> 등을 통해 중년 등 새로운 뮤지컬 시장을 발굴해냈다. 서울연극협회도 겸하고 있는 그는 올해부터 차범석 뮤지컬상을 후원할 예정이다.



글 이인선 객원기자 sun906@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