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 못한 환율급등으로 파생금융상품 '키코' 덫에 걸려 생존 기로지난해 환율 하락기에 대거 은행과 키코 계약 맺어피해 늘어 '갑을관계' 묶여 말도 못하고 냉가슴

“우리처럼 조그만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사업자들이 환율이 오르고 내리는 것을 어떻게 예측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거래은행 담당자들이 말하는 전망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밖에요. 지금 와서는 그저 은행이 원망스러울 뿐입니다.”

수출로 먹고 사는 수많은 중소기업들이 큰 위기에 봉착했다. 최근 환율급등 여파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고 있기 때문이다. 통상 환율상승(원화가치 하락)은 수출대금으로 달러나 엔 등의 외화를 받는 수출기업에게 득이 되는 게 일반적이다. 환율이 오르게 되면 수출대금으로 받는 외화의 원화 표시 금액이 늘어나 매출도 증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상당수 중소 수출기업들은 환율변동(하락)에 따른 손실 위험을 회피(헤지ㆍhedge)하고자 가입한 파생금융상품 ‘키코’(KIKOㆍKnock-In Knock-Out)의 덫에 걸려, 환율상승의 혜택은 고사하고 도리어 생존의 위기로 내몰려 있는 상황이다.

키코는 환율이 일정한 범위 내에서 오르내릴 경우 미리 약정한 환율에 약정 금액(외화)을 매월 팔 수 있는 상품이다. 주로 은행권에서 수출기업을 상대로 판매한다.

가령 A기업과 B은행이 원-달러 환율의 범위를 상단 1,000원과 하단 900원으로 하고, 매도 약정환율을 950원으로 정한 키코 계약을 맺었다고 치자. 만약 약정기간(대개 1년) 동안 환율이 상하단 범위 내에 머무른다면, A기업은 매월 약정금액(달러)을 원-달러 환율 950원에 B은행에 매도할 수 있다.

키코의 장점은 매도 시점의 실제 외환시장 환율이 약정환율 950원을 밑돌아도 950원에 팔 수 있기 때문에 환 손실을 피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매도 시점의 시장환율이 약정환율을 웃돌 경우에는 시장환율에 외화를 팔 수 있다. 수출기업 입장에서는 상당히 매력적인 조건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금융거래에서 계약당사자 한쪽만 일방적으로 유리한 경우란 거의 없다. 키코 역시 부대조건이 좀 복잡하다. 통상적으로 키코 계약을 맺은 기업은 한 달에 한 번씩 약정금액을 매도하게 돼 있다.

만약 한 달 동안 단 한 번이라도 미리 약속한 하단 환율 이하로 내려가면(Knock-Outㆍ이하 녹아웃), 그 달의 키코 계약은 무효가 된다. 앞의 사례로 보자면, 시장환율이 890원으로 내려간 경우를 상정할 수 있겠다. 이렇게 되면 기업 입장에서는 시장환율에 외화를 팔 수밖에 없다.

문제는 훨씬 더 무서운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상단 환율 이상으로 시장환율이 올라가는 경우(Knock-Inㆍ이하 녹인)다. 대부분 키코 상품은 녹인이 발생할 경우 약정금액의 2~3배를 약정환율로 은행에 매도해야 하는 조건을 달고 있다.

원달러 환율이 1020원 선을 넘긴 지난 3월 17일 서울 을지로 외환 은행 본점 딜링룸에서 딜러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다. 김주성 기자
원달러 환율이 1020원 선을 넘긴 지난 3월 17일 서울 을지로 외환
은행 본점 딜링룸에서 딜러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다. 김주성 기자

가령 매월 매도 약정금액이 10만 달러인 계약조건에서 환율이 1,100원으로 급등하는 녹인 상황이 벌어졌다고 하자. 이 경우 A기업은 B은행에 20만~30만 달러를 팔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기업이 자체 보유 중인 달러가 넉넉한 경우에는 그걸 내다팔면 되기 때문에 당장 큰 탈이 생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중소기업치고 외화를 넉넉히 보유하고 있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녹인이 발생하면 기업 입장에서는 단지 은행에 매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높은 시장환율에 달러를 사들인 후 낮은 약정환율에 되팔아야 하는 황당한 처지가 되는 것이다.

A기업이 매월 매도하기로 한 약정금액 외에는 여유 달러가 전혀 없는 가운데 녹인 상황이 발생한 경우를 가정해보자. 또 약정금액의 3배를 매도해야 하는 조건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A기업은 원화 2억2,000만 원으로 20만 달러를 추가로 외환시장에서 사들인 뒤 B은행에 팔아야 한다.

이때 A기업이 20만 달러를 주고 B은행에서 받는 원화는 약정환율 950원이 적용되기 때문에 1억9,000만 원에 불과하다. 즉 3,000만 원을 고스란히 손해보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앉아서 큰 손실을 보게 되는 녹인 발생 확률이 높다면 어떤 기업도 키코 계약을 할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많은 중소 수출기업들이 키코의 수렁에 빠져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키코 계약은 원화 환율이 추세적으로 하락세를 보인 최근 몇 년 사이 많이 이뤄졌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실제 분기별 원-달러 평균 환율은 2005년 4분기 1,050원 언저리에서 지난해는 930원 근처까지 내려갔었다. 원-엔 환율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경제 전문가들의 관측도 환율이 계속 하락할 것이라는 쪽에 무게 중심이 실렸다.

환율이 꾸준히 떨어지는 상황이라면 수출기업 입장에서는 환 손실을 피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런 터에 키코가 매력적인 대안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물론 은행들도 환율하락 전망을 기초로 수출기업을 상대로 한 키코 상품 판매에 열을 올렸다.

지방에 위치한 건설자재 전문업체 C사는 일본 수출물량이 상당 비중을 차지하는 업체다. 이 회사 안모 대표는 지난해 원-엔 환율이 뚝뚝 떨어져 애를 태우던 차에 평소 친하게 지내던 주거래은행 관계자로부터 키코 상품 추천을 받았다. 서울 본점의 파생상품 담당자가 직접 내려와 상품의 장점을 적극 홍보하기까지 했다. “과거 경험에 비춰 원-엔 환율이 1년 동안 100원 이상 오를 일은 없다”며 안심시키기도 했다.

그러잖아도 고심이 많았던 안 대표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지난해 9월 1년짜리 키코 계약을 주거래은행과 맺었다. 처음 몇 달간은 은행의 설명처럼 환 손실을 피할 수 있어 안도했다.

하지만 올 초부터 사단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1월부터 거의 매달 녹인이 발생한 것이다. 지금까지 5개월 동안 키코로 입은 손실은 3억 원이 넘는다. 3억 원은 지난해 1년 내내 땀을 흘려 안 대표가 벌어들인 순이익과 맞먹는 액수다. 결국 1년치 농사를 헛일로 돌린 셈이다. 그런데도 그는 은행에 항의 한 번 하지 못하고 혼자서 끙끙 앓고 있다. 소위 ‘갑을관계’의 을 입장에서 갑에게 대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외환은행 직원이 달러 뭉치 앞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안 대표는 “약정서에 키코의 손실 위험에 대한 내용이 명시돼 있다고는 하지만 은행 담당자는 단 한마디의 부정적인 설명도 없이 장점만 부각시켰다”며 “지금까지 손실도 크지만 남은 계약기간 동안 또 얼마나 손해를 입을지 가슴이 답답하다”고 푸념했다.

경기 안산 소재 컨베이어 시스템 수출업체 D사의 피해는 자못 심각하다. 지난해 원-달러 환율이 900원대 초중반으로 내려간 시점에 키코 계약을 여러 건 맺은 D사는 환율상승 여파로 지난 4월까지 무려 75억 원에 달하는 손실을 입었다.

D사 관계자는 “최근 수 년간 은행이나 유력 경제연구소에서는 환율을 900원대 전후로 전망한 데다 거래은행이 키코를 권유해 계약을 체결했는데 지금 와서 손실의 책임은 몽땅 우리가 지게 됐다”며 “정부나 은행측이 키코로 입은 손실을 보전할 수 있는 실질적 대안을 내놓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소기업 관계자들은 최근 환율상승에 정부의 책임도 적지 않다고 성토하고 있다. 이른바 ‘747 공약’을 내걸고 등장한 이명박 정부가 성장률을 중시하다 보니 수출실적 증대를 위해 환율상승을 용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같은 정책방향이 키코 계약을 맺은 수출기업에게는 오히려 독(毒)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한 중소 수출업체 대표는 “환율이 적당히 오르는 게 수출업계에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 지금 업계 사정은 그렇지 않다. 그런데도 경제부처 핵심 인사들이 환율이 더 올라야 한다는 식의 발언을 하는 것을 보니 속이 뒤집어진다”며 정부에 화살을 날렸다.

최근 중소기업중앙회가 수출기업 174개사를 대상으로 긴급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약 1/3 가량의 업체가 키코 상품을 이용해본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키코 거래로 손실을 본 업체 가운데 손실 총액이 1억~10억 원인 경우가 28.8%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50억 원 이상의 대규모 손실을 입은 업체도 1.9% 정도 됐다.

하지만 국내 전체 키코 계약 금액이 얼마나 되며, 또한 피해업체의 손실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는 금융당국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전체 피해 규모가 2조5,000억 원 가량 된다는 일부 보도가 있었지만, 이것도 공식 통계와는 거리가 먼 어설픈 추정일 뿐이다.

키코와 같은 파생상품은 금융당국의 심사나 허가 대상이 아니어서 정확한 현황이 집계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금융감독원 파생상품감독팀 관계자는 “은행이 파생상품 라이선스를 갖고 있으면 개별 계약에 대해 일일이 심사를 받지 않는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국내 금융시장에서도 파생상품 시장 규모가 날로 커지고 있어 적절한 감시감독 시스템을 갖춰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금융공학의 고도화로 별의별 파생상품이 출시되는 마당에, 이를 시장 참여자의 손에만 맡겨 놓는 것은 잠재적 위험의 불씨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부터 세계경제를 뒤흔들어 놓은 미국 서브프라임(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 사태도 따지고 보면 부동산을 담보로 한 각종 파생금융상품이 통제불능 상태로 시장에 쏟아져 나와 거래된 게 발단이었다.

어쨌든 키코 사태는 앞으로도 더욱 확산될 조짐이어서 귀추가 주목된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주도적으로 대응방안 마련을 위한 간담회를 개최하는가 하면, 일부 피해업체는 은행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상황이다. 여기에는 키코 계약의 불공정 여부 조사에 나선 공정거래위원회의 향후 판단도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결론이 어떻게 내려질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키코 사태는 우리 금융시장의 건전성을 한 번쯤 점검하고 넘어갈 수 있는 좋은 계기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 중소기업 환헤지 실태는…
10개 기업 중 8개 환율변동 위험 무방비

중소기업중앙회의 조사에 따르면 최근 환율상승은 수출업계에 극명한 명암을 드리운 것으로 나타났다. 손익 영향에 대한 질문에 “악화됐다”는 답변(52.8%)과 “호전됐다”는 답변(44.3%)이 엇갈린 것. 특히 악화됐다는 답변이 많았다는 것은 환율상승이 수출기업에 일반적으로 유리하다는 상식과 어긋나는 결과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는 수출기업들의 환헤지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중소 수출기업들이 환헤지 수단으로 가장 많이 활용하는 것은 수출보험공사의 환변동보험이다. 중앙회 조사에 따르면 전체의 46.8%가 환변동보험을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환변동보험은 기업이 환율변동으로 입게 되는 손실은 보상하고 이익은 환수하는 보험제도다.

하지만 이익 환수가 중소기업들에게는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하는 듯하다. 환변동보험을 이용할 때 느끼는 애로사항으로 “과도한 환수금 납부”를 호소한 답변이 35.9%로 가장 많았기 때문이다. 제도에 대한 설명 부족과 보험료 부담, 이용 절차상 불편을 지적한 업체도 적지 않았다.

이외에 중소 수출기업들이 많이 이용하는 환헤지 방법은 시중은행 선물환거래(25.0%), 통화옵션(13.8%), 통화스왑(2.7%), 통화선물(2.1%)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전체 중소 수출기업 가운데 환헤지 상품에 가입하는 비율은 겨우 20% 수준에 불과하다. 10개 기업 가운데 8개는 환율변동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는 것이다. 중앙회 정지연 과장은 “중소기업은 경영 여건이 열악한 데다 환율 관련 전문가도 없고 절차도 잘 모르는 게 현실”이라고 안타까워 했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