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필자가 경영하는 회사 사무실로 이른 아침부터 전화가 폭주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대성그룹 홍보실 관계자였다. 아침 일찍부터 이 관계자가 전화를 건 이유는 몇일 전 발표한 ‘대기업 여성 주식부자’ 명단에 지난 2006년 작고한 여귀옥 여사의 이름이 포함된 때문이었다. 여 여사는 대성그룹 창업자인 고 김수근 회장의 부인이었다.

이 관계자는 “어떻게 작고한 분의 이름이 살아있는 사람처럼 주식부자 명단에 나올 수 있느냐”며 강력히 항의했다. 필자는 그의 말을 수긍해 “뭔가 착오가 있었다”며 자초지종을 확인토록 지시했다.

확인 결과 여귀옥 여사의 사망은 사실이었다. 작고한 분을 주식부자 명단에 올린다는 것은 당연히 잘못된 것이어서 즉시 이를 시정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였다. 얼마 후 또 다른 곳에서 전화가 걸려와 “여귀옥 여사가 작고한 것은 맞지만, 주식은 아직 본인 명의로 돼 있기 때문에 틀리지 않았는데 왜 명단에서 뺐느냐”는 항의성 전화였다.

필자는 너무 황당해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진짜 대성그룹”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직전의 상황을 설명하니 또 다른 대성그룹 관계자는 “말은 맞지만 (여귀옥 여사의 이름을) 빼지 않아도 된다”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도대체 왜 이런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진 것일까. 나중에 내막을 알아보니 이랬다. 여귀옥 여사는 이미 작고했지만, 2년이 지나도록 생전에 보유하고 있던 대성산업 주식 15만여 주는 여태 그의 명의로 있다. 지난 5월말 대성산업이 금융감독원에 제출한 주주명단에도 여 여사의 이름과 주식수는 변함이 없다. 이미 작고한 사람이 산 사람처럼 공문서에 기재돼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여 여사가 보유했던 주식에 대한 상속 절차를 밟지 않은 때문이었다. 현재 시가로 계산하면 이 주식의 가치는 170억 원대에 이른다. 이 주식이 상속되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된 이유는 상속 문제를 둘러싸고 유가족들이 치열한 다툼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장남은 장남대로 “내 것”이라고 주장하고 차남은 차남대로 “생전에 내게 주려고 했다”며 맞서고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공중에 붕 떠 있는 상태인 것이다.

이와 비슷한 상황은 비단 대성그룹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상당수 대기업 가문에서 부모가 보유했던 주식 지분을 상속하지 않은 채 수십 년 혹은 수년간 그대로 둔 경우가 더러 있다.

실제로 대림산업의 주주명단에는 이미 십여 년 전에 작고한 이재형 전 국회의장의 보유 주식이 그대로 남아 있다. 회사측은 “직계가족이 외국에 거주하고 있어 상속절차를 밟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원칙적 답변을 하지만, 속내를 뜯어보면 복잡한 가족상황 때문이 아닐까 하는 짐작을 낳게 한다.

우리의 장례절차를 보면 고인이 생전에 입었던 옷가지나 유품을 불에 사린 뒤 재를 하늘로 날려주는 문화가 있다. 이는 죽은 사람의 혼령을 위로하고 저승에서 편안히 눈을 감도록 하기 위함이 목적이다. 망자(亡者)가 남기고 간 재산을 두고 후손들이 다툼을 벌여 그대로 방치해 둔다면 저승에서도 속이 불편할 것이다. 효(孝)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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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섭 재벌닷컴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