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은 한국 경제의 독일까, 약일까?

필자는 20여년 동안 경제부 기자로 일하면서 재벌이라 불리는 많은 기업들을 취재했다. 때로 재벌을 폄하하기도 하고, 때로 재벌을 칭찬하기도 했다. 혹 필자의 이런 생각을 두고 ‘개념 없는 사람’이라고 질타할 지는 모르겠다.

필자는 재벌이란 단어에 대해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특히나 요즘에는 필자가 설립한 회사 이름이 ‘재벌닷컴’이다 보니 재벌에 대한 생각이 어떤 것이냐는 질문을 주변에서 자주 받곤 한다.

약간은 억지스러울 지는 모르겠지만, 필자가 가진 재벌에 대한 생각은 이렇다.

먼저 재벌이라는 단어에 대한 일반인들의 생각이 매우 부정적인 것만은 사실이다. 단어의 구성 자체가 ‘재물(財物)’과 ‘족벌(族閥)’을 합친 것이니 태생적으로 거부감을 가진 말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필자는 솔직히 재벌이라는 단어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진 않다. 영국의 옥스퍼드 사전에 오른 몇 안 되는 한국어 중 하나가 재벌이다. 이 사전은 재벌이라는 단어를 ‘한국의 기업에 존재하는 독특한 기업 지배구조 방식’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런 학문적 해석을 떠나 필자는 재벌이라는 단어 속에는 ‘법인’(회사)의 개념과 ‘자연인’(소유자나 경영인)의 개념이 합쳐져 있다는 생각이다.

언젠가 공정거래위원장과 전경련 회장이 공석에서 “앞으론 재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말아 주세요. 너무 부정적인 말입니다”라고 제안한 것을 언론 보도를 통해 접한 적이 있다. 공정거래위원장은 한 술 더 떠서 “재벌이라는 말 대신 ‘대기업집단’이라는 말만 쓰자”고 부탁까지 했다.

필자는 이 보도를 접하고 약간은 실소했다. 그 이유는 재벌이라는 어감이 어떠하든 간에 이 말 속에 담긴 깊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재벌이란 말을 대기업집단으로 바꿔 사용해달라”고 주문하던 당사자가 또 다른 자리에서는 “재벌개혁이 필요하다”고 역설했으니 어딘지 앞뒤가 맞지 않았다. 당연히 그의 논리대로라면 “대기업집단을 개혁하자”고 해야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대명천지에 멀쩡히 잘 나가는 회사를 개혁하자고 한다면 그것이 맞는 말일까. 재벌이라는 말에 담긴 진짜 의미와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정책 결정자들이 구상하고 만들어내는 법과 제도가 바른 것인지 필자는 갑자기 의문이 들 정도였다.

대기업집단과 재벌의 의미에 대한 구분법도 없이 ‘재벌=개혁대상’쯤으로 생각하다 보니 기업 자체가 가진 선량성이나 공익성이 무시된 사회 분위기가 형성될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갈 게 있다. 기업이나 기업 경영인들에게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은 애당초 무리한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기업이나 기업인은 본질적으로 ‘이윤창출’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윤창출이라는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 기업과 기업인이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재벌이라는 단어가 갖는 진짜 의미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우리의 전통문화가 세계적인 것이 되듯, 한국의 토착적 기업 경영방식인 재벌도 경쟁력 있는 기업문화가 될 수는 없을까.


정선섭 재벌닷컴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