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필자는 서울시내 중심가에 있는 서점에 신간서적을 살펴보러 갔다가 한 대기업 홍보실 임원을 마주쳤다. 몇 년 만의 조우여서 여간 반갑지 않았다. 악수만 하고 헤어지기는 너무 섭섭해 근처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겨 새삼스럽게 옛날을 돌이키며 이런저런 정담을 나눴다.

그런데 신변 얘기로 주제가 넘어가자 그의 얼굴색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하긴 예전 같으면 한창 바빠야 할 평일 낮시간에 한가로이 서점에서 마주친 것도 궁금했다. 더욱이 그가 감추듯이 손에 들고 있는 ‘창업’ 관련 서적에도 눈길이 갔다.

“뭐 딱히 할 일도 없구….” 필자의 궁금증을 알아챘는지 그 임원은 푸념하듯이 말했다. 그의 말인즉슨 이랬다.

요즘 기업 홍보실의 기능이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는 게 골자였다. 예전에는 홍보실이 회사와 오너를 적극 홍보하는 두 가지 업무를 맡았으나, 최근 들어 이들 역할이 줄거나 아예 없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회사 홍보는 마케팅 부서로 넘어가고, 오너에 대한 홍보는 그때그때 필요할 때만 기능을 하는 파트타임 업무가 되었다고 한다.

자연스레 홍보실 예산은 쪼그라들고, 활동 폭이 줄어들다 보니 한때 수십 명에 이르던 인원마저 감축돼 일개 부서보다도 못해졌다. 그는 몇 명의 부하 직원만 데리고 있는 자신이 회사의 고위 임원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울 정도라고 했다. 직원들 사이에서는 ‘과장급 임원’이라는 말도 들린다고 한다.

예산이 없으니 평소 친분이 있는 기자들이 안부 전화라도 걸어오면 걱정이 앞선단다. 그래서 이런저런 핑계로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다. 혹 재무담당 임원이 “예산집행 내역 명세서를 보내달라”고 다그칠 때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갈 심정이 된다. 그런데도 회사나 오너와 관련해 조금이라도 나쁜 보도가 흘러나오면 회장, 부회장이 마치 ‘역적’을 쳐다보듯 눈을 부라린다고 한다.

최근 삼성그룹이 그룹의 중추역할을 하던 전략기획실을 없애면서 그룹홍보조직을 해체한다고 하자, 상부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홍보실 조직변화’ 보고서를 내라고 지시해 가슴이 철렁했다. 30년을 기업체 홍보맨으로 살아온 그에게 변화가 온다는 것은 곧 회사를 떠나는 길밖에 없다는 뜻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언론에서는 ‘홍보맨 전성시대’라는 보도를 흔히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홍보분야 출신 임원들이 줄줄이 계열사 사장으로 승진하면서 회사에서 잘 나가는 듯이 보였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격세지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말이었다.

이처럼 기업 홍보실의 역할이 줄어든 가장 큰 이유에 대해 그 임원은 “계량화된 수치로 나타나지 않는 실적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는 방향으로 기업의 경영방식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사실 홍보는 경영의 입장에서 보면 비용을 발생시키는 업무이지 생산적인 것은 아니다. 설사 홍보업무가 생산적이라고 할지라도 결과물을 수치로 환산해 내기도 어렵다.

하지만 홍보의 생산성에 대해 미국이나 일본 기업들은 보다 전향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나이키와 펩시콜라, 그리고 일본의 렉서스가 이룬 신화는 홍보로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이들 기업은 마케팅 조직과는 별개로 세계 곳곳에 지역별 홍보 책임자를 두고 회사 이미지를 높이기 위한 활동을 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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