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우리에 대해서만 일방적으로 사찰하겠다는 것은 9ㆍ19 공동성명에 따르는 미국 핵위협 제거를 골자로 하는 전조선반도 비핵화는 집어 던지고 서로 총부리를 맞대고 있는 교전일방인 우리만 무장해제시키려는 강도적 요구이다. 우리가 조선반도를 비핵화하려는 것은 우리 민족에게 가해지고 있는 핵위협을 제거하기 위해서 이지 결코 우리의 핵억제력을 놓고 흥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6자회담이 지금처럼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함부로 농락할 수 있는 마당으로 전락된다면 그런 6자구도가 과연 누구에게 필요하겠는가. 미국이 이번에 우리나라가 ‘테러지원국’이 아니라고 내외에 공식선언하고도 검증문제를 이유로 명단삭제를 연기한 것은 그 명단이라는 것이 실제로 있어서는 테러와 관련된 명단이 아니라는 것을 자인한 것으로 된다.

우리는 ‘미국에 고분거리지 않는 나라’ 명단에 그냥 남아있어도 무방하다. 지금 미국은 우리 나라의 자주권을 엄중히 침해하려 하고 있다. 미국이 합의 사항을 어긴 조건에서 우리는 부득불 ‘행동 대 행동’ 원칙에 따라 다음의 대응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10ㆍ3합의에 따라 진행 중에 있던 우리 핵시설 무력화작업을 즉시 중단하기로 하였다. 이 조치는 지난 14일 효력이 발생되었으며 유관측들에게 통지되었다.

둘째, 우리 ‘해당 기관들’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영변 핵시설물을 곧 원상대로 복구하는 조치를 고려하게 될 것이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이 8월 26일 발표한 성명의 끝부분이다. 글의 끄트머리에서 ‘해당 기관들’이란 어느 기관을 가리키는가? 그 원전을 찾아 본다.

2002년 10월 4일 하오 5시. 평양 외무성 부상실. 강석주 제1부상은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일행에게 “내가 먼저 말 하겠다”며 성명을 읽었다.

<<나는 오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당과 정부를 대표해 여기에 왔다. 어제 밤과 아침까지 우리는 중요한 회의를 열었다. ‘모든 관계부처’, 군, 원자력청 등을 대표하는 책임자가 출석했다. 오늘 내가 말하는 것은 그 총의임을 먼저 말해둔다. 우리가 고농축 우라늄(HEU) 계획을 갖고 있는 게 뭐가 나쁘다는 건가. 우리는 HEU계획을 추진할 권리가 있고, 그보다 더 강력한 무기도 만들게 돼있다. 부시 정권이 이처럼 우리들에 대해 적대시 정책을 취하는 이상 우리가 HEU계획을 추진한다 해서 무엇이 나쁜가. 그것은 미국의 적대시 정책에 대한 억지력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켈리 차관보는 전날(10월 3일) 김계관 부상에게 “북한이 HEU 계획을 실행중인 증거가 있다. 이는 제네바 합의를 어긴 것이다”고 경고했었다.

2002년 강석주 부상의 발언이 바로 최근 북한 외무성의 ‘불능화 이전으로 돌아가기’ 성명의 원본임을 금새 알 수 있다. 다만 2002년의 ‘모든 관계부처’가 ‘해당 기관’으로 말만 조금 바꾸었을 뿐이다. 이 ‘부처’와 ‘기관’은 군이다.

군의 총수는 북에서 누구인가. 물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다. 2002년, 2008년의 두 성명은 김 위원장이 지휘 작성한 것이다. 이를 증명하는 이가 있다.

2006년 6월 국무부 한국과장 직을 떠나기까지 북핵 문제를 다룬 테이비드 스트로브 남가주대 교수<1954년 켄터키 태생. 루이즈빌대 학사(75년), 국무부 독일 영사(76년), 주한 미대사관 정치담당참사관(79~80, 82~84), 한국과장(2002~2004), 주일공사(2006년), 스탠포드대 한국연구소 부소장>. 그는 캘리 차관보의 평양 방문 당시, 그리고 1, 2, 3차 6자회담 수석대표의 핵심 참모였다. 연세대 어학원에서 한국어를 연수한 그는 캘리의 모든 연설의 작성자였다.

캘리는 강 부상의 HEU 발언이 끝나자 그에게 말했다. “농축 우라늄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지?”

국무부를 떠난 스트로브는 2006년과 2007년 아사히신문 주필 후나바시 요이치가 ‘김정일 최후의 도박’을 쓸 때, 그와 인터뷰했다. 또 CNN방송 베이징 지국장과 특파원을 지낸 마이크 치노이는 지난 8월5일 낸 저서 ‘Meltdown’(붕괴)에서 스트로브와의 인터뷰 내용을 20여쪽 가량 담았다.

강석주의 독백 같은 2002년 10월의 성명(?)을 들은 스트로브는 결론을 냈다.

<<강석주는 독백하듯 말했지만 그 뒤에는 김정일의 지휘라는 배경이 있다. 그는 김정일을 연기했다. 그를 통해 나는 북한이 농축 우라늄이 있음을 인정하고 김정일은 부시와 정상회담을 갖고 싶다는 소망이 있음을 감지했다. 어쨌든 한국어를 아는 미국 대표들은 강석주가 농축 우라늄이 있다고 말한 것에 동의했다.>>

스트로브는 부시 정부 아래서 체니, 라이스, 존 볼튼(국무부 핵담당 차관) 등 강경파와 국무부의 파월, 아미티지, 켈리 등 포용주의자 간의 역겨운 싸움을 보며 2003년 4월 국무부를 떠나기로 마음 먹었다. <<이렇게 내부 대립을 반복하는 정부는 도대체 뭐 하는 곳인가. 이걸 도대체 정부라 할 수 있을까. 거기서 외교관으로 일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는 2004년 6월 일본 공사로 전보됐다. 2006년 스탠포드에 온 그는 2008년 8월의 외무성 성명을 읽고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6자회담이 북한의 핵 포기 결단에 확신을 주지 못하고 있듯 나머지 5개국 역시 경수로 제공 등 북한의 요구를 들어줄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못하고 있다. 모호함으로 가득찬 6차회담이라는 틀이 최대 위기에 직면해 있다… 늘 단기적인 관점에서 북한이 이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그럴까? 1990년대 이후 핵문제를 둘러싼 협상과정에서 보여준 북한의 선택이 결과적으로 북한을 조금도 나아지게 하지 못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마이크 치노이의 ‘멜트다운’을 읽어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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