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근영<1932년생. 육군 종합학교 일반학처장으로 육군대령 예편(81년) ‘진주류씨 역대인물전’(2006년), ‘충장공 류림장군’(2006년) 저술.> 류동희<1957년생,한국일보 기자(82년), 베이징 특파원(93-95년), 한국일보 충남 취재본부장으로 2002년 퇴사. ‘그들이 중국을 움직인다. 1,2’ (2002년) 씀>. 류씨 부자는 10월13일자의 “47년전 숭례문 실측자료 찾았다”는 보도를 보고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이 보도는 “1961-63년 숭례문 해체 보수작업에 도면 기록작성에 나섰던 최용완<70ㆍ서울대 건축과, 미네소타대 석사, 미국 거주(66년)>씨가 그때의 실측자료를 가져와 숭례문복구단이 이를 분석중이다”는 것이었다.

이 보도는 2008년 4월에 나온 류근영, 류동희가 함께 쓴 <죽당 류진동(柳辰仝) - 文武藝에 빛나는>이 책 제1장에서 제기한 “숭례문 현판 글씨의 주인공은”이란 의문 제기에 답을 주는게 아니었다.

숭례문복구단을 맡고 있는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물론 이 ‘글씨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이 없었다.

‘죽당 류진동’을 함께 내면서 류동희는 2월10일 밤부터 11일 새벽까지 숭례문이 불 탈 때 “TV를 통해 현판이 떼어 떨어지는 모습과 2층 문루가 무너져 내리는 참담한 장면을 지켜 보았다. 561년간을 지켜 내지 못했다는 사실에 후손의 한 사람으로 죄스런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화재로 인해 세상이 알고 있듯이 현판을 쓴 사람이 양녕,안평대군만이 아니라 그들 부자가 낸 평전의 주인공 ‘류진동’도 그 이름이 알려지기를 기대했다. 또한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역사적 인물을 그가 5년여 일한 사회부 사건기자의 추적기사 다루듯 현판을 쓴 이’을 추적하고 싶었다.

진주 류씨의 족손이란 부담은 사진기자, 추적기자의 객관정으로 뚫고 나가기로 했다. 그는 아버지의 깊은 동의하에 ‘현판을 쓴 한사람으로 류진동<연산군3년(1497년)-명종15년(1561년)> 공조판서를 추적 취재에 나섰다. 이제는 류동희 전 기자, 언론인이 된 그의 ‘누가 썼나’의 추적을 요약한다.

<< 정조20년(1796년) 대제학 홍양호는 류진동에게 시호<현신이나 유현 등이 죽은 뒤에 그 생전의 공덕을 기려 임금이 추증하던 이름>를 내려 달라는 시장(諡將)을 낸다.

이중 “…필법은 옛법에 따랐는데 숭례문의 현판 글씨는 공의 글씨라 한다” 그림도 잘 그렸는데 특히 대(竹)에 능했다”는 대목이 있다.…

홍양호가 시장을 쓴 7년 뒤인 1806년(순조6년)에 정동유는 <만필집 주영편>에서 숭례문의 현판글씨는 중종조에 공조판서를 지낸 죽당 류진동이 쓴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 같은 사실은 숙종조의 대장, 즉 훈련대장으로 있던 류진동의 고손 류혁연(1616-1680.광해군 8년-숙종6년)에 의해 뒤늦게 확인 되었다. “세간에서 이야기 하는 양녕대군이 썼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결론 내렸다.

고종조에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1814-1888. 순조14~고종25년)은 1871년 12월에 낸 ‘임하필기’에서 양녕대군 사손(祀孫)인 이승보(1814-1880) 대감이 윤성진(1826-?) 대감과 연전에 남대문 중수할 때 함께 판각의 개색한 것을 보았더니 “후판대서는 공조판서 류진동의 글씨 였다”고 기록한 것이다. 이유원은 이 문장 앞에서 숭례문의 현판 글씨가 양녕대군이 쓴것으로 알려진 게기가 이수광의 ‘지봉유설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혔다. 이유원은 양녕대군의 사손 이승보가 문루에 올라간 배경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추측컨데 류진동의 후손 류혁연이 류진동이 필자임을 밝혔다는 문귀가 실제 있었는가를 확인 하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윤성진은 말하자면 객관적 입장의 증인 자격이었을 것이다. 이유원의 글에 따르면 이승보와 윤성진은 류혁연이 발견한 것을 확인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유원은 “이것은 옛날의 화재가 난뒤 다시 쓴 것인가 싶다”고 자기나름 글을 맺었다. 요약하자면 손상되어 류진동이 고쳐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유원은 중수시기가 언제였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임하필기’를 쓰기 4개월 전인 고종8년(1871년) 숭례문 동쪽 체성을 보수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도 그 무렵으로 추정된다.>>

이런 믿을만한 ‘쓴 이 류진동’의 근거가 있음에도 류동희 추적기자는 옛 글씨 쓰는 법을 따르는 류진동의 서체를 추적하며 다른 현판쓴이들의 가능성도 쫓았다. 류동희는 지난 2월에 화재로 ‘현판쓴 이에 대한 약간의 논란이 있었음에 만족 한다. 다만 아버지와 함께 추적한 진실이 많은 이들이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왜 그렇게 느끼는가를 요약한다.

<<숭례문으로서는 최대 시련인 2008년2월11일 방화 화재로 2층 문루가 완전히 무너져 내린 가운데서도 1층 문루는 부재의 80%를 사용할수 있을 만큼 기적적으로 보존되었다. 또한 석축 부분은 손상없이 무사했다. 이 때문에 복원되더라도 문화재적 가치는 유지될수 있으리라는 전망이 조심스레 나오고 있다. 이는 숭례문 현판글씨가 보우(保佑)한 때문이리라. 이제 불길속에 온전히 보존된 숭례문의 현판글씨는 서울중심을 다시 보호 하기 위해 숭례문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숭례문의 심장과 혼인 현판글씨가 온전한 이상 숭례문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부활하는 것이다.>>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