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지않는 사랑만이 상처를 아물게 한다

‘자책’의 파괴력은 얼마나 무서운가. 젊은 어머니와 어린 딸이 여행가방을 끌고 나와 차 안에서 졸면서 막이 오른다.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상연중인 뮤지컬 ‘소리도둑’의 서막이다.

이 모녀는 유명가수인 남편이자 아빠를 공연중 사고로 잃고 고향으로 향하는 길이다. 어린 딸 아침이는 말을 전혀 하지 못한다.

주위에서 이유를 물으면 ‘소리도둑이 내 말을 훔쳐갔다’고만 글자로 설명할 뿐이다. 인경 역시 깊은 상처를 안은 채 시골 미장원을 운영하며 삶을 이어간다. 이 딱한 모녀를 바라보는 마을 주민들은 그저 애처럽기만 하다. 항상 주위를 맴돌며 노래하는 ‘실패 전문’ 작곡가 유준과 바보 치린은 어느새 아침이의 친구가 된다. 이들은 아침이의 말을 되찾아주려 애쓴다.

치린의 잡동사니 창고를 놀이터삼아 드나들게 된 아침이. 그리고 어느날 마침내 외마디 절규처럼 ‘아빠’라는 말을 토해낸다. 노래식 대화에는 반응한다는 사실을 인경 가족과 주민들이 알게 되면서 다함께 아침이의 ‘소리도둑’을 쫓기 위한 노력이 시작된다.

실어증 뒤에 숨은 이유도 밝혀진다. 록가수인 아빠의 공연날, 불운의 감전사로 사망한 것을 자신의 탓으로 생각해 그 충격과 자책감으로 입을 닫게 된 것. 온 마을 주민들이 단합해 모종의 대작전을 꾸민다.

비슷하게도, 젊은 시절 고열로 실려온 아이를 치료했다가 끝내 사망하자 자책감에 시달리며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고립시킨 소아과 최원장도 어렵사리 가세한다. 다시 기억하기도 고통스러운 사고 당일의 현장이 재연되고, 아침이는 극도의 혼란과 고통을 오가다 마지막 선택을 내린다.

이 작품은 1998년 개봉돼 전세계인의 감동을 불러일으켰던 호주 영화 ‘에이미’를 모티브로 한 것이다. 극작?연출 조광화, 작곡 김혜성의 손을 거쳤다. 출연진도 쟁쟁하다.

한국 뮤지컬계의 대명사 남경주(유준 역), 최정원(인경 역), 송영창(소아과 최원장 역)을 비롯해 신예 유망주 라준(바보 치린 역)등이 출연해 ‘간판 값’을 충실히 지불한다. 아역 배우 박도연(아침이 역. 심재영 공동배역)의 활약도 기대 이상이다. 특히 후반부에 터지기 시작하는 노래는 뮤지컬 ‘레 미제라블’에서 어린 코제트가 불렀던 ‘Castle on a cloud'의 감동을 떠올리게 한다.

그에 못지 않다. 바보 역을 개성있게 소화한 라준을 비롯, 극 곳곳에서 잔잔한 재미와 정감을 전해주는 ‘인기상’ 후보들이 출연자 상당수다. 대사와 대사, 출연자간의 호흡도 매끄럽다. 스토리 및 장면 전환도 적절한 속도로 달린다.

‘소리도둑’ 얘기중 갑자기 미용실 근처에 널려있던 빨랫감들이 벌떡 일어나 거대한 귀신 형상을 하며 일렁이게 한 설정, 레이저 쇼를 연상케하는 기발한 플래쉬 연출, 반딧불용 초롱 행진 등 재치있는 소도구 활용과 착상이 돋보인다. 드라마적인 음악과 구성 또한 작품의 감흥을 높인다.

사랑의 상실과 결핍은 언제 누구에게든 다양한 형태로 상처와 흉터를 남긴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포기없는 사랑만이 사랑을 아물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미 어린이가 어린이가 아닌 조숙의 시대. 그리고 가정의 달. 또다른 모양의 소리도둑, 마음도둑을 염려하는 가족들에게 추천할 만하다. 25일까지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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